[연재 에세이] 임주빈의 ‘음악이 있는 서가’ - 점성술의 음악, 별의 음악 <행성The Planets>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2024-10-0300:01
《음악소설집》(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지음, 프란츠, 2024)
현실은 버겁고 미래 또한 확신할 수 없었던 젊은 시절에 사주 잘 본다는 역술인을 찾은 적이 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나도 알아채지 못한 내 성향,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줄줄이 얘기해주는데다 득이 되고 해가 될 일까지 삶의 해법을 제시해주는 역술인의 명쾌한 화술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때 역술인의 얘기는 대부분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당시엔 왜 그렇게 신통하게 느꼈었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는 사주 풀이 외에도 타로 점, 잡지나 신문에 나는 오늘의 운세니 별자리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 일련의 행위들은 한때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미래나 운명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는 운세 풀이 방식은 동서고금을 통해 숱하게 많을 것이다. 그럴듯한 것부터 이해 불가한 기상천외한 방법들까지 다양하지만, 그중 점성술은 지역에 따라 구성과 해석이 다르긴 해도 동서양에서 고대로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해온 점술이라 여겨진다. 특히 서양 점성술은 한 인물이 탄생하던 순간의 태양과 달, 행성들의 위치를 기반으로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천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 때문에 왠지 신비롭기도 하고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점성술 역시 운세 풀이의 한 종류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점성술에 매료되어 음악을 만들고 그것이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이 된 작곡가 있다. 바로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Gustavus Theodore von Holst,1874~1934)다. 스칸디나비아 혈통의 증조부부터 4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홀스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오른 팔 신경염으로 인해 피아니스트가 아닌 트롬본 연주자로, 합창 지휘자로, 교육자로, 작곡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시력도 약하고 천식을 앓는 등 건강이 안 좋았던 탓에 신경도 매우 예민했다고 한다. 그의 삶이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용성과 경제성을 중시하고 표현이 직접적이라는 것인데, 건강상의 이유와 함께 명확한 사고와 감정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1913년 3월의 어느 날, 나이 서른아홉의 홀스트는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기차 안에서 저마다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홀스트는 클리포드 박스(Clifford Bax)라는 작가 친구와 점성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스는 홀스트에게 점성술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다. 홀스트는 바로 그 얼마 전 점성술사이자 작가인 앨런 리오(Alan Leo)의 책을 읽었던 터라 점성술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평소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홀스트의 스타일로 봐서 점성술이 다음 작품의 소재가 되리라는 것을 친구들은 다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14년부터 3년에 걸쳐 탄생한 곡이 바로 대규모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The Planets)>이다. 화성, 금성, 수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이름을 가진 일곱 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드뷔시의 <녹턴> <바다> 같은 관현악,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곡은 영국 음악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으며, 홀스트 특유의 파격적인 박자와 오스티나토, 때때로 등장하는 다성, 오르락내리락하는 음계가 사용됨으로써 그의 음악 성향이 뚜렷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홀스트는 생전에 이 곡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걸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홀스트의 그 많은 작품을 제치고 오늘날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를 기억시키는 유일한 작품으로 남았다. <행성>은 등장하는 악기의 수도 많은데, 이들이 악기군별로 저마다 흩어졌다 모아졌다 또는 차례대로 등장하며 화려한 색채를 만들어내고, 독특한 리듬과 오르간, 첼레스타가 포함된 악기 구성이 듣는 이로 하여금 광활하고 신비로운 우주를 상상하게 하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홀스트의 <행성> 탄생과 연관된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설이 지난 7월에 출간됐다. 은희경 작가의 <웨더링>이다. 이 소설은 단독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주제를 놓고 다섯 명의 작가가 쓴 ‘음악 앤솔러지’ 가운데 한 편이다. 책의 제목은 ‘음악소설집’. 지금 한국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작가의 소설 모음집이다. 그들은 음악이 어떤 식으로 소설 속 인물들의 일상에 들어와 있는지 저마다의 이야기를 펼친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김연수의 <수면 위로>, 윤성희의 <자장가>, 은희경의 <웨더링>,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 이 다섯 작품의 필요조건은 ‘음악’이다. 예상대로 팝, 클래식, 자장가, 노래방 음악, 피아노 교습소 등 소설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서 음악을 가장 구체적이고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이 은희경의 <웨더링>이다.
<웨더링>은 G시로 가는 기차의 4인석에 타게 된 네 명의 인물(기욱, 노인, 준희, 인선) 각자의 지난날에 대한 상념과 현재 심경을 그린 소설이다. 인선과 준희만 일행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서로 모르는 사이다. 일행이 아니면서 좁은 공간에 마주 앉게 됐으니 서로의 행동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때 저마다의 과거 혹은 현재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공통의 요인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그 음악은 노인이 펼쳐놓고 들여다보던 악보, 구스타브 홀스트의 관현악모음곡 <행성>이다.
노인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인선에게 그 음악은 지금은 헤어진 옛 애인과 뉴욕 출장 중에 가본 음악회에서 들은 잊지 못할 곡이고, 노인 옆자리의 기욱으로선 노래 악보도, 트럼펫이나 피아노 악보도 아닌 오케스트라 총보를 펼쳐놓은 노인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욱은 클래식음악 전공자인데다 지금 G시에 음악회 진행과 해설을 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자신만 빼고 다른 세 명이 다 아는 듯한 이 곡이 궁금해진 준희는 귀에 에어팟을 꽂고 이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한다. 이 음악으로부터 기욱은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에 매료됐던 중학 시절의 음악 시간, 음악 선생을 회상하게 됐고, 인선은 그 음악과 함께 시작된 지난날의 연애, 연인을 반추하게 됐다. 준희는 이제 막 이 음악에 매료되는 참이다.
노인은 이 곡이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요양원의 형님이 좋아하던 곡이라고 했다. 맘에 드는 연주가 없는지라 음악을 듣기보다는 악보를 보며 자신의 머릿속에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기욱은 까탈스럽게 보이는 노인에게서 25년 전 중학교 음악 선생을 떠올린다. 음악 선생은 불만이 많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자기 기분에 따라 트집을 잡아 학생들 뺨을 때리기도 하던 인물이었다. 기욱은 노인의 어투에서 음악 선생이 내던 배타적인 냉소와 무력감으로 가득 찬 어조를 읽어내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기차는 마침내 G시에 도착하는데, 기차에서 요양원에 있는 형님의 부고 문자를 받은 노인은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가야 하고, 기욱은 행사장으로, 회사 동료 부친상에 문상 가는 중이던 인선과 준희는 장례식장으로 가기에 앞서 한잔하기 딱 좋은 날씨라며 브루어리로, 각기 제 갈 길을 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은희경 작가는 <웨더링>에서 네 사람의 이야기와 더불어 홀스트의 <행성> 작곡 배경이 작곡가의 점성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는 것, 곡의 각 악장에 대한 해설까지도 잘 버무려 넣었다. 이 소설을 읽는 누구라도 홀스트의 <행성>이라는 곡을 한 번쯤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음악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홀스트의 <행성>으로 돌아가 음악을 들어본다. 음악은 태양계의 일곱 행성과 각각에 해당하는 그리스 신화의 신을 주제로 한 일곱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1곡 ‘화성(Mars), 전쟁을 가져오는 자’로 시작해서 2곡 ‘금성(Venus), 평화를 가져오는 자’, 3곡 ‘수성(Mercury), 날개 달린 메신저’, 4곡 ‘목성(Jupiter), 쾌락을 가져오는 자’, 5곡 ‘토성(Saturn), 노년(老年)을 가져오는 자’, 6곡 ‘천왕성(Uranus), 마법사’, 끝 곡 ‘해왕성(Neptune), 신비로운 자’까지, 각 악장에 부제가 붙어 있다. 홀스트는 점성술 작가 리오(Leo)의 책에서 각 행성의 성격에 따라 ‘화성, 전쟁의 신’, ‘토성, 수확자’ 같은 식의 별명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작품에도 각 행성 별로 부제를 붙인 것이다. 이 곡에 나오는 행성들의 순서가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순서가 아닌 것은 이 곡이 천문학적인 배경에서 작곡된 것이 아니라 점성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준다.
일곱 곡 가운데 제목은 모를지라도 들으면 바로 친근한 멜로디임을 알 수 있는 곡은 네 번째 곡 ‘목성(주피터)’이다. 벌써 오래전이지만 한 지상파 방송사의 메인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됐기에 귀에 익숙하다. 중간에 나오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주제 선율은 따라서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친근한데, 영국에서는 이 선율에 ‘나의 조국, 나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라는 애국적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음악 감상]
홀스트 G. Holst / <행성 The Planets> 중 ‘4. 목성 Jupiter – 쾌락을 가져오는 자 the Bringer of Jollity’
(수잔나 맬키Susanna Mälkki(지휘), BBC교향악단BBC Symphony Orchestra. 2015년 7월 27일 BBC Proms 로얄 알버트홀 공연 실황)
‘목성’ 외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전쟁의 신의 모습이 연상되는 ‘화성(Mars)-전쟁을 가져오는 자’,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여신이 아기를 잠재우듯 부드러운 선율로 연주되는 ‘금성(Venus)-평화를 가져오는 자’, 목관 악기의 빠른 상승과 하강으로 이곳저곳 날아다니는 요정을 떠오르게 하는 ‘수성(Mercury)-날개 달린 메신저’ 등 각 행성의 음악들은 저마다 그 특성에 맞게 묘사되어 있다. ‘토성(Saturn)-노년을 가져오는 자’는 모든 악기들이 돌아가며 노년의 움직임에 걸맞게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연주한다.
‘천왕성(Uranus)-마법사’는 힘찬 관악기로 시작해 경쾌하고 허둥거리는 폼이 만물을 창조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우라노스 신의 모습을 마법사로 묘사한 듯하고, 마지막 ‘해왕성(Neptune)-신비로운 자’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와 하프와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가 신비감을 조성한다. 곡이 시작하고 5분에 가까워질 무렵,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가사 없는 구음(口音) 형태의 여성 합창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마치 안개 자욱한 바다에서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관현악에 뜻밖의 여성 합창을 사용한 것은 홀스트가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했었고, 세인트 폴 여학교에 재직하면서 여성 음악 교육에 힘을 쏟았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한다. 홀스트는 신비감을 더하는 음향 효과를 위해 여성 합창단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서게 하지 않고, 무대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성 합창이 소멸하듯 서서히 디크레센도로 마무리될 때는 합창단이 있는 곳의 문을 서서히 닫으라는 지시를 써놓았다. 그래서 곡의 마지막은 들릴락 말락 끝나는 것이다.
다시 은희경 소설 <웨더링>. 기차에서 에어팟을 끼고 처음으로 <행성>이라는 곡을 들으며 몰입해 있던 준희는 마지막 악장 ‘해왕성’에 이르러 여성 합창이 나오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러 당황한다. ‘낯설고 부드럽고 신령스러워서 자신의 몸이 창밖에 펼쳐지고 있는 소멸의 풍경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상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해왕성’ 악장의 신비로운 고요함에 한참 취해 있다가 느닷없이 등장한 여성 합창 대목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음악 감상]
홀스트 G. Holst / <행성The Planets> 중 ‘7. 해왕성Neptune – 신비로운 자the Mystic’
(수잔나 맬키Susanna Mälkki(지휘), BBC교향악단 BBC Symphony Orchestra. 2015년 7월 27일 BBC Proms 로얄 알버트홀 공연 실황)
수많은 평범한 이가 자신의 한때를 사주 풀이, 점성술, 타로 점 등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운세 풀이에 빠트리곤 한다. 대개는 명운(命運)을 알게 되기는커녕 시간과 돈, 감정의 낭비라는 결과만을 얻고 만다. 그런데 홀스트는 이 한때를 자신의 대표작이 될 작품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내 운명을 운세 풀이에 맡길 것인가, 운세 풀이를 내 운명에 이용할 것인가. 모든 일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자명한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클래식FM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는 곡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이 하이네(H. Heine)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의 첫 곡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다. 1840년에 작곡됐다. 그 해는 슈만과
새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예는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하고 흥미롭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기억 속 첫 번째 책은 무엇인가.A 정확한 전집 타이틀이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학생백과》와 《소년소녀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