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임주빈의 '음악이 있는 서가' - 나이 예순에 다시 들여다보는 십대의 번민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2024-03-0709:19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귀는 출처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마치 늘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익숙하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는 아마도 십대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거쳤을 것이다. 그 통과의례는 다름 아닌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독일)의 소설 《데미안》을 읽는 것이었다.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학교 성적, 입시라는 굴레에 묶여 그다지 즐거울 게 없던 1970년대 중고생이었던 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시간이 나를 황홀하고도 자유로운 세계로 데려다 주었으니까. 《데미안》 역시 그런 시간을 선물한 소설이었다.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우리 또래가 겪을 법한 이야기인데다 책에 클래식 음악이 언급되기에 (한창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때였으니) 더욱 흥미를 가지고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데미안이라는 흠모의 대상, 동경의 인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여행이라고 할 책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속했던 ‘밝은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다면적인 세계를 경험하며 성인이 되어가는 성장소설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세 인물이 싱클레어를 성장시키는데,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이다. 그들은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던 싱클레어에게 생각의 유연함, 기존의 것에 대한 비판 정신을 심어주고, 신과 신앙생활, 종교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해준다. 실로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하는 새처럼, 그도 힘든 시기를 거쳐 드디어 밝음과 어두움, 양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자기의 친구이자 길 안내자’로 여겨온 신비로운 존재 ‘데미안’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헤세의 작품을 ‘악보 없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헤세는 자신의 작품에 늘 음악이 흐르게 한 작가다. 《데미안》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바흐(J. S. Bach)에 대해 얼마나 큰 경외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의 음악을 통해 밝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향유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그것은 아마도 헤세 자신의 음악적 경험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소설에는 바흐 외에 막스 레거(M. Reger)와 북스테후데(D. Buxtehude)의 오르간 음악이 언급되는데, 작품 전체에서 곡명이 확실하게 언급되는 곡은 딱 두 곡이다.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 싱클레어는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 ‘온갖 신비로운 전율을 간직한 비밀스러운 세계의 어둡고도 강렬한 수난의 광채가 나를 가득 채우곤 했다’고 했으며,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에 대해서는 ‘아주 정선된 옛날 오르간 음악’이라는 표현을 썼다. 특히 북스테후데, 바흐, 레거의 오르간 음악들은, 싱클레어 인생에서 세 명의 안내자 중 하나인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작곡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독일)는 싱클레어의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할 만큼 음악사상 가장 위대하고 성실한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선대로부터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였으며, 두 번의 결혼(첫 부인 사별 후 재혼)으로 스무 명의 자식을 낳아 그들의 음악 교육까지 맡는 집안의 충실한 가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독일을 벗어나지 않은 채 교회에 봉직하면서 수많은 교회음악을 만든 신심 두터운 성실한 작곡가였다. 당연히 동시대와 후대 많은 음악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바흐가 1727년에 작곡한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은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성 금요일 예배를 위해 작곡된 음악극(수난극)으로, 총 예순여덟 개의 성악곡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연주 시간이 세 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다.
내용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겪은 수난을 기록한 성경의 마태오 복음 26장과 27장으로, 성경의 텍스트를 낭송하는 사이사이 음악적 완성도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창작 대본에 붙인 아리아와 합창, 기존의 코랄 등이 첨가됐다. 지금도 기독교의 수난 시기가 되면 전 세계 교회 및 여러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인기 있는 명곡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곡은 바흐 시대에 교회에서 연주된 후 다시 공연된 일이 없어 하마터면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가 100여 년이 지난 1829년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 멘델스존에 의해 복원, 공연되면서 후대에 전승,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듯 이 곡도 부활했다고 할까?
나는 〈마태수난곡〉 중에서 특히 2부에 나오는 알토 아리아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를 좋아한다. 20세기 영화감독 중 가장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구 소련 태생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의 영화 〈희생〉의 처음과 마지막에 흘러 더 유명해지기도 한 이 아리아는, 예수님이 붙잡힌 후 사람들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내용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그는 분명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자비를 구했을 것이다. ‘나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기소서 / 여기 보소서, 당신 앞에서 제 마음과 눈이 애통하게 우나이다 / 나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가사가 나오기 전, 곡의 도입부에 나오는 바이올린 오블리가토의 애절한 선율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마음에 남는다.
[음악 감상]
바흐(J. S. Bach)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 중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노래: 율리아 하마리Julia Hamary)
《데미안》에서 곡목이 명확히 나오는 또 하나의 음악은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passacaglia)〉다.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 독일)는 바흐보다 조금 앞서 활동한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는 당대 바흐는 물론 헨델 등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자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를 방문할 정도로 아주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다. 특히 90곡에 이르는 그의 오르간 작품은 정열적이고 극적이며 환상적인 스타일로, 젊은 시절 바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파사칼리아’는 원래 17,8세기에 스페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행한 춤곡의 하나로,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기악 형식인 ‘모음곡(suite)’에 한 악장으로 포함되거나 단독으로 연주되곤 했다. 느린 3박자로 대개 단조의 변주곡 형식을 취하는데, 북스테후데는 〈파사칼리아 d단조〉를 남기고 있으니, 싱클레어가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피스토리우스에게 연주해달라고 청했던 음악이 아마 이 d단조 파사칼리아였으리라 생각한다. 싱클레어는 ‘저녁 무렵 어두운 교회에서 나는 특이하고 내면적이며 자신 속에 침잠하여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이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내게 좋은 작용을 해서 영혼의 목소리가 옳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음악 감상]
북스테후데 Buxtehude / 파사칼리아 passacaglia d단조
(오르간: 톤 쿠프만Ton Koopman)
십대 방황의 시기에 마음을 사로잡았던 《데미안》을 예순이 넘어 다시 꺼내본다.
풋풋하던 시절이 그리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때 나는 미래를 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면 이제는 내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반추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헤세가 《데미안》의 첫 머리에 쓴 문장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에 내 삶을 비춰보게 된다. 나는 어찌 살아온 것일까?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왔나? 현실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온 ‘나’와 나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참 나’가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화해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순간순간 어려운 일이 있었겠으나 그것이 나를 성장시켰으리라.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기성세대가 된 나는 이제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모든 젊은 ‘싱클레어’를 응원한다. 그대들도 언젠가 ‘데미안’이 될지니, ‘참 나’를 찾아내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기 바란다. 그러니 지금 힘들다 해도 용기를 잃지 말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것은 음악으로였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서 접한 조르바의 춤이란 곡은 독특한 음색의 악기와 심장이 뛰는 듯한 리듬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자연히 그 영화가 궁금해졌고, 이어서 원작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차례로 음악에서 영화로, 마침내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영화의 마지막,
해마다 5월이 되면 클래식FM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레이리스트에 올리는 곡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이 하이네(H. Heine)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의 첫 곡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다. 1840년에 작곡됐다. 그 해는 슈만과
얄팍하고 가벼워서 손에 들면 기분마저 좋아지는 책 《콘트라바스》는 내게는 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은 1985년 라디오 음악 PD로 사회의 첫발을 뗀 나의 멘토였으며 롤 모델인 동시에 스승이었고 선배였다. 38년의 방송국 생활에서 그분처럼 강직하고 성실했으며 열심인 분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어느 날, 클래식FM(당시는 1FM) 부장이셨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