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해 전 겨울, 채석강에서 엄청난 눈보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격포 허름한 찻집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서해의 눈보라는 잊을 수 없다. 겨울 바다는 황량했지만, 바닷물에 녹아 사라지는 눈발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위안보다 따뜻했다. 서해에 내리는 눈이 낙조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퍼붓던 눈발은 만경뜰을 지나 군산 IC에 들어섰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때의 강한 인상 때문인지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부안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올해는 전원시인 신석정 선생 작고 50년이 되는 해이다. 가혹한 일제치하, 선생이 부안의 자연 속에서 시심을 키웠고 시대의 고초를 이겨내며 시 창작에 몰두했던 그곳을 천천히 거닐며 선생의 삶을 만나고 싶었다.
부안 IC를 빠져나와 군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바로 고택 청구원과 석정문학관이 나타난다. 고택 바로 인근에 문학관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먼저 왼편에 있는 청구원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네 칸 초가집이 반긴다. 소박한 살림집이다. ‘청구원(靑丘園)’이라 반듯하게 쓴 현판이 안방 문중방 위에 걸려 있다. 선생께서 스물일곱 살 때 새로 집을 지으시고 지은 옥호다. 푸른 언덕에 있는 집, 곧 자연 속에 묻힌 동산이란 뜻일 것이다. 지금은 반듯하게 길도 나고 고층 건물도 들어섰지만 90년 전 당시의 모습이 바로 ‘청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께서 태어나신 곳은 여기서 좀 떨어진 동중리 303-2번지이다.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1931년 귀향 후 이곳에 새로 집을 지어 분가했는데, 바로 이 집이다. 1952년 전주시 노송동 ‘비사벌 초사(艸舍)’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선생께서 심고 가꾸던 앞뜰 벽오동 · 자귀나무 · 모란, 동쪽 감나무, 서쪽 시누대,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는 없어졌어도 3, 40대를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을 쓰셨으니 선생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선생은 청구원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문학만은 필생의 업으로 삼으려니 굳은 각오도 해보고 밤을 새워 독서와 사색에 여념이 없었던 때도 바로 그때다. 아마 나에게 참다운 생활이 있었다면 그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도 내 학문의 재산이 남아 있다면 그 무렵에 읽고 생각했던 것의 잔재에 불과할 것이다’(《나의 문학적 자서전》).
어두운 시대였다. 그때 삼천리강토는 송두리째 감옥이었고, 일제의 몇몇 앞잡이를 제외한 모든 겨레는 그대로 이 감옥에서 신음하는 복역수였다(<슬픈 구도>). 선생은 한때 섣불리 문학의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고 쓴 글들을 고스란히 불살라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허기와 갈증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문학밖에 없었다.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시집을 사들이고 읽었다.
이곳에서 초기의 시집 《촛불》 《슬픈 목가》가 탄생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작은 짐승>과 같은 작품을 이곳에서 고뇌를 견디며 탄생시킨 것이다.
시의 숲을 거닐다
청구원 앞뜰은 시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기우는 해> <고운 심장> <망향의 노래> <임께서 부르시면> 등 작품을 새겨 전시하고 있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선생은 청소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낮은 언덕 잔디밭, 백화등 칭칭 감고 올라간 바위 언저리, 그곳에서 아득한 섬, 붉게 타는 저녁놀을 덧없이 바라보다가 어둑어둑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소년의 일과였다.
무료하기만 한 긴긴 봄날, 영광에서 먼 친척뻘 되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 둘은 계화도에 놀러 갔다. 《창조》에 실린 주요한의 <불놀이>를 낭송하며 문학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물이 빠지자 바닷길 10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수평선 넘어가는 붉은 놀을 만났다. 장관이었다. 그때 쓴 작품이 첫 작품 <기우는 해>다.
3연으로 된 시의 마지막 연이다. 이 시를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나의 문학자서전>,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지식에 목마른 스물다섯 청년은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있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향했다. 1930년 3월이다. 당시 이 학교는 불교계의 석학 박한영 스님이 교장으로 있으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여기서 1년여 동안 불교 경전은 물론, 문학 서적을 탐독했다. 이때 한용운 스님을 비롯해 이광수, 박용철, 이하윤, 정지용, 조종현 등 당대의 젊은 문인, 지식인들을 만났다.
교육 과정을 마친 후, 진로를 고민했다. 문학 활동을 하려면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문우 김기림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치고 고향 부안으로 내려왔다. 고향 산천이 다시 그를 끌어내린 것이었다. 그 후 부안과 전주에 머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인생을 피날레할 때까지 나는 줄곧 시와 더불어 살리라.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된 행동의 일단이기 때문에…….’(<못 다 부른 牧歌>). 시는 곧 선생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했다.
1974년 68세의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촛불》(1939), 《대바람 소리》(1970) 등 5종의 시집과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 탄생 100주년을 기해 간행된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2007)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밖에 가람 이병기 선생과 공저로 출판한 《명시조 감상》(1958), 당시를 선하여 번역 출판한 《당시선집》(1975), 《매창시집》 대역(1958) 등도 의미 있는 도서들이다.
선생은 동양적 자연관에 목가적 분위기를 결합해 독특한 시 세계를 형성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정신의 바탕에는 노장철학이 깔려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권영민은 “신석정의 시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로써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높은 산, 흐르는 물처럼
고택 옆에 있는 석정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석정문학관은 2011년 10월에 개관했다. 선생의 저서와 친필 원고, 유품,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해 생애와 시 정신, 성장 배경과 교유 등 선생의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9년까지 석정문학회에서 운영해오다가 지금은 부안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선생의 사진과 함께 친필로 쓴 좌우명이 반긴다.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뜻은 높은 산처럼 의연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렇게 높은 산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아왔다. 이 좌우명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백아와 종자기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백아가 높은 산의 기상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높고 높은 그 뜻이 높은 산에 있구나’(峨峨乎志在高山) 하였고, 백아가 넘실대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넓고 넓은 그 뜻이 흐르는 물에 있구나(洋洋乎志在流水)’라 하였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굳이 무어라 군더더기 말을 달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곧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를 석정 선생과 자연으로 대치할 때, 선생과 자연은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전시실 내부는 선생 생전의 모습처럼 단아하고 차분하다. 교류했던 문인들과 그들의 사진, 문집을 전시하여 당시의 문학사조와 흐름 속에서 선생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시와 살겠다고 다짐한 선생의 시 정신이 유리 상자 속 시집에서 빛나고 있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하셨던 선생의 음성이 들린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마침 ‘석정의 노래전’이 듣는 시, 보는 시, 만지는 시를 부제로 열리고 있었다. 지난해 선생의 시 작품을 노랫말로 하는 ‘제1회 전국 신석정 창작음악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백여 팀이 응모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이 전시는 수상작을 제작 감독 영상 인터뷰, 점자 등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선생의 시를 재해석하여 신세대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부안문화재단 안후경 주임은 선생 50주기를 맞아 특별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문학관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꾼 석정의 생태주의 시선’을 주제로 하는 ‘아름다운 지구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생명력을 지닌 생태학적 치유 공간으로서의 자연관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뿐만 아니라, 선생께서 읽었던 식물 사전, 식물도감, 곤충기 등 도서, 관련 유품 등이 전시된다고 한다. 특히 선생이 직접 키우시던 난을 아직도 유족이 소중히 키우고 있어, 이 난도 전시하게 된다. 석정문학관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해석과 발견을 통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문학관 밖에서 선생의 시 정신을 기리고 확산하는 일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1984년 창립한 석정문학회는 동인지 《석정문학》을 36호째 발간하고 있다. 1996년부터 석정문학제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2014년에는 신석정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신석정문학상, 촛불문학상을 제정, 시상해오고 있다. 2015년부터는 신석정전국시낭송대회 등 풍성한 선양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문득 문학관을 나오면서 선생께서 첫 작품 <지는 해>를 쓸 때 바라보았던 서해의 저녁노을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시집 《촛불》을 간행할 무렵의 시들이 “청구원 주변의 산과 구릉과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 그 서해의 바람을 만나고 싶었다.
솔섬으로 차를 몰았다.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청년 시절 바라보았던 ‘밝언 북새’처럼 노을은 붉게 타고 있다. 계화도에서 돌아올 때 보았던 그 노을이다. 바람은 잔잔했다. 선생은 거기 소나무 한 그루로 서 있었다. 해는 지고, 어둑어둑 어둠이 밀려올 때쯤 악수하며 솔섬을 떠난다.
주변 맛집 / 양촌리식당 뼈다귀탕
계획에 없던 것을 경험하는 것이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기쁨이듯, 맛집 탐방 역시 계획에 없던 곳과의 만남이 때론 큰 기쁨을 선사한다는 것을 이번 부안편에서 다시금 느낀다.
부안에는 군에서 누에타운을 운영할 정도로 뽕나무를 많이 키우고 있다. 그래서 뽕잎을 식재료로 한 음식점도 많다. 선생은 뱅어, 석화를 맛나게 드신 것 같다. ‘옛날 진상을 했다는 곰소 뱅어 맛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숫제 구경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고향 친구들도 이젠 해창 석화로 입맛을 달래겠지……”(<고향에 해가 저문다>).
선생께서 맛나게 드셨을 뱅어나 석화는 찾지 못하고 문학관에서 추천해준 부안읍 양촌리식당을 찾았다. 선생의 고택 청구원에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젊음의 거리에 위치한다. 음식이 그렇듯 서민적 정감이 가는 식당이다. 외지 손님보다는 지역 주민이 많이 찾는 식당이었다. 이 식당의 주 메뉴는 뼈다귀탕(Pork back-bone stew)이다. 돼지 등뼈와 목뼈 부위를 주재료로 한 칼칼하면서도 매콤하고 약간 걸쭉한 국물이 포인트다.
뼈다귀탕보다는 감자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원당 감자탕, 참이맛 감자탕, 조마루 감자탕 등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브랜드명에 ‘감자탕’을 쓰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뼈 사이사이에 붙은 고기도 요리의 핵심이고 뚝배기에 담아 나오기 때문에 ‘뼈(다귀)해장국’으로도 불린다.
양촌리 ‘뼈다귀탕’ 역시, 돼지 등뼈, 그 사이사이에 붙은 살코기와 속살, 우거지, 시래기, 깻잎, 들깻가루. 된장, 고추장이 잘 어우러져 오랜 시간 끓인 국물답게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신선한 제철 채소를 고집한다는 주인장의 말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맛집이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밑반찬과 갓 지은 솥밥, 그리고 뚝배기에 담긴 뼈다귀탕, 고기도 두툼하고 국물맛도 칼칼하고 시원한 뚝배기였다. 어떻게 보면 부대찌개와 비슷한 맥락에서 백여 년 전 민족의 슬픈 시절과 그 기원을 같이한다는 점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소박한 우리 음식임에 분명하다.
경향수_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로 있다. 대학 시절 음악다방에서 DJ를 맡으면서 다양한 음악에 빠졌다. 회사에 입사해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많은 조리장을 만났다. 틈틈이 음악과 음식이 어울리는 글을 쓰고 있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담고 있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경향수 대표가 강릉의 김동명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12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가을 단풍 짙게 물든 대관령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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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경향수가 만해문학박물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6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문학관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늘 고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