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담고 있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
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경향수 대표가 강릉의 김동명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12월호에 싣는다.
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김동명문학관 Ⓒ경향수
가을 단풍 짙게 물든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향하는 마음은 설렌다. 10월 마지막 날, 어떤 사람은 아쉬워하고 어떤 사람은 가을 빛깔에 빠져든다. 가수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의 한 소절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우리는 헤어졌지요’, 또 바리톤 김동규가 부른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의 한 소절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가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딱히 떠오르는 대상은 없어도 10월은 누군가를 그립게 한다.
김동명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 테너 윤서준이 부른 가곡 <내 마음>을 볼륨 높이고 듣는다. 음색은 맑고 힘 있지만 가사와 곡의 분위기는 분명 가을이다. 강릉 하면 먼저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그리고 강릉 5문장으로 꼽히는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이다. 몇 해 전 ‘강원도를 빛낸 근대 인물 7인’에 선정된 김동명 선생은 강릉을 대표하는 근대 문인이다.
강릉 군수가 되어야 한다
김동명 선생은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신문물이 도입되면서 사회가 극도로 어지러웠던 1900년,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강릉시 사천면 하노동리(下蘆洞里) 5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제옥, 어머니는 신석우이다. 어머니는 외지를 다니며 놋그릇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활달하고 강한 분이셨다. 일찍부터 선생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외동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궁벽한 시골 마을을 떠나 큰 도회지로 나가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시동생이 원산에서 직장을 잡고 있던 터라 미련 없이 원산 행을 택했다. 선생의 나이 9살 때였다. 강화도조약으로 1880년에 개항한 원산은 교통, 운수의 중심지가 되었고 외래 문물이 유입되면서 항구도시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더구나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일찍 깬 어머니의 결단으로 시작한 힘든 객지 생활이었지만 김동명 선생에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내 나이 어렸을 제 우리들이 타관에 나와 단간방 셋간살이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날 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내가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나?” 그때나 지금이나 다소의 과대망상증을 가진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다. 순간 어머니의 눈은 빛나셨다. 내 신념에 움직이신 듯 - 그리고 은근하신 어조로 “강릉 군수가 되어주렴.” 이것은 어머니의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시었으리라. 그러나 비단옷이 아니고는 돌아가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슬픈 결심이시기도 하다. (수필집 《세대의 삽화》, 1959)
나이 어린 아들이었지만 선생은 객지를 떠도는 어머니의 꿈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갈 수 있는 최고 위치가 강릉 군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은 오직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원산에서 소학교를 마친 선생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함흥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캐나다 신부가 설립한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이러한 학문의 길에는 확고한 어머니의 신념이 있었다. 선생의 장남 김병우 교수는 “할머니는 정신적 근대화와 물질적 근대화 중에 전자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정신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원산으로 떠났던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단신 월남하여 참의원이 되다
1931년 선생의 나이 32세 되던 해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선생이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원산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펴낼 무렵이었다.
아아, 타박녀의 울음소리. 타박녀의 뒷모습. 이것은 내 눈물의 옛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어느 사이 어머니를 잃은 타박녀가 되었구나. 더욱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눈물도, 동심도, 다 잃어버린, 세상에도 가엾은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수필 〈어머니〉)
크나큰 상실이었다. 어머니의 꿈, 강릉 군수 금의환향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선생에겐 끝내 한으로 남았다. 이후 선생은 영생고등학교, 흥남중 등에서 교사, 교장으로 있으면서 1938년에는 대표 작품 〈파초〉를 《조광》 1월호에, 〈내 마음〉을 6월호에 발표했다. 194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현실에 선생은 붓을 던지는 것으로 대항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리도 욕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싶어, 나중에는 내 자신마저 싫어지고 미워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취하거나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싶은 것이 그 무렵의 내 심경이었다. (〈술의 노래〉 해제, 《모래 위에 쓴 낙서》, 1965)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참혹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좌우명으로 삼은 성경 구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를 마음에 새기고 새겼다. 종교적 신념으로 현실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동명과 두 딸 Ⓒ김동명문학관
광복이 되자 선생은 정치활동에 참여한다.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조선민주당 흥남시당 부 위원장을 거쳐 함남도당부 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반탁을 주장했던 조선민주당은 당수 조만식 선생이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47년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북한 체제로부터 단신으로 월남했다.
월남 후에는 이화여자대학에 몸담고 여러 매체에 정치 평론을 발표한다. 자유당의 부패상에 날카로운 비평도 가했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출범한 지 불과 9개월 만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의회는 해산되었다. 선생은 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안수길 선생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치의 마당에 들어가야 했고, 남달리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김동명 선생의 시와 애국심〉, 《신동아》 3월호, 1968).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강릉군수가 되어 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선생을 끝까지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김동명의 시, 가곡으로 태어나다
1923년 《개벽》 10월호에 〈애닯은 기억〉 등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선생은 《나의 거문고》(1930), 《파초》(1938) 등 여섯 권의 시집과 《세대의 삽화》(1959), 《모래 위에 쓴 낙서》(1965) 등 두 권의 수필집, 그리고 《적과 동지》(1955), 《역사의 배후에서》(1958), 《나는 증언한다》(1964) 등 세 권의 정치 칼럼집을 남겼다.
김동명의 작품들 Ⓒ김동명문학관
선생에게 문학이란 진실된 삶의 표현인 동시에 그 진실된 삶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당시 다른 문인들과 달리 동인 활동이나 문단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엄창섭 교수는 선생을 ‘일제의 암흑기를 기독교적인 경건성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허무의식을 극복하여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 ‘구속을 원하지 않는 자유인이기를 추구하는 예언자적인 시인으로 민족의 생명력을 긍정한 인물’로 평가했다. 또한 심은섭 교수는 ‘조국 상실에 따른 역사적 번민과 고뇌로 점철된 정열과 의지를 기원의 시로 승화시킨 민족시인’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김동명 시에 나타난 기원사상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제51집, 2006).
사람들은 보통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작품 〈파초〉와 가곡 〈내 마음〉 〈수선화〉로 지금도 선생을 만난다. 가곡은 초등학교 제자 김동진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탄생되었다. 김동명 선생의 인품과 시를 좋아했던 작곡가 김동진 선생은 은사의 시를 늘 애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악상이 떠올라 그 감흥을 오선지에 옮겨 적어간 것이 바로 가곡 〈내 마음〉이다. 〈수선화〉는 국내에서 우리말 노래를 발표할 수 없게 되자 1942년 중국 장춘에서 작곡하여 발표했다. 이것이 당시 만주 지역을 순회하던 우리 성악가들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김동진 선생은 그의 스승 김동명 선생과 〈수선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노래 수선화는 김동명 시인의 성격처럼 차가운 것 같지만 따사롭고 약한 듯하면서도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불멸의 영혼이라 노래한 그의 애국적 생활이 보여주듯 조국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분은 늘 나랏일로 고민했고 시도 그런 바탕에서 씌어졌으니까요. (《주간독서》, 1968. 6. 21)
그 자리에 문학관으로 서다
김동명문학관은 선생이 나고 자란 강릉시 사천면 샛돌1길 30-2에 있다. 동해고속도로 북강릉 톨게이트를 나와 강릉 방향으로 가다 보면 사천육교 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가면 ‘교산한과’ 등 익숙한 한과마을 간판이 보인다. 노동리 마을회관 못 미처 왼쪽에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으로 향하는 마을 길, 가을 햇살을 받아 붉게 익어가는 탐스러운 홍시가 그대로 풍경화처럼 정겹다.
김동명 생가 Ⓒ경향수
문학관에서 먼저 만나는 곳은 선생의 생가다. 이엉을 얹은 흙벽의 단출한 초가다. 객지로 떠나기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삶을 꾸려가던 곳이다. 선생은 수필집 《세대의 삽화》에 수록된 〈어머니〉를 통해 이 집에서의 추억을 회상한다.
내 나이 어렸을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말하면,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 글에서 보이는 코쿨도 재현해놓았다. 코쿨은 방 귀퉁이에 설치한 방한 도구다. 코쿨에 잘게 쪼갠 관솔로 불을 피워 등잔불을 대신했고 난방도 겸했다. 선생의 가족이 원산으로 떠난 후 빈집으로 남아 있는 것을 현 위치에 그대로 복원했다.
김동명 생가의 난방기구인 코쿨 Ⓒ경향수 김동명 서재 Ⓒ경향수
생가 바로 옆에 문학관 건물이 있다. 선생의 대표작 〈내 마음〉에 나오는 호수와 돛단배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했다. 아담한 단층 문학관은 전시실과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자세한 연보, 작품의 흐름을 알 수 있는 해설 패널,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자필 원고, 시집 《하늘》 《진주만》 《목격자》 등의 초간본도 만날 수 있다. 여느 문학관과 같이 집필실도 재현하고 있다. 유품은 그리 많지 않지만 선생의 체취가 남아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전시품은 1930년에 간행된 첫 시집 《나의 거문고》다. 그간 이 첫 시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2017년 김동명선양사업회 심은섭 회장이 오랜 수소문 끝에 원주 한 민속품 가게에서 찾아냈다.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지만 눈여겨봐야 할 의미 있는 전시품이다.
맞은편에 있는 제2전시실은 관련 도서를 전시하고 있는데 각종 문화행사장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백일장, 북 콘서트, 강연, 가곡의 밤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수시로 열린다.
김동명 시비 Ⓒ경향수
문학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난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면 육중한 김동명 시비가 노동 들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시비 중앙탑은 길게 하늘을 향해 힘차게 돋아나는 파초 싹을 형상화하고 그 전면에 ‘김동명 시비’라는 비명과 시인의 초상화를 판각했다. 중앙탑 좌우에 대표작 〈파초〉와 〈내 마음〉을 새긴 시비가 자리한다. 이 시비는 1985년 김동명 시비 공원에 있던 것을 2018년 7월에 문학관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로써 생가, 문학관, 시비, 그리고 묘소가 한곳에 모이게 되었다.
김동명학회, 김동명선양사업회 심은섭 회장 Ⓒ경향수
문학관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는 2013년에 창립한 김동명학회와 2021년에 발족한 김동명선양사업회다. 현재는 심은섭 교수가 두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다. 김동명학회에서는 매년 전국학술대회를 개최하고 학회지 《김동명문학연구》를 발간하고 있다. 올해 제11집을 발행했다. 또한 학회에서는 엄창섭, 장정룡, 심은섭 3인이 공동 집필한 《달빛 물결》을 발행했고, 김동명선양사업회에서는 《김동명시전집》 상하권을 지난해 발간했다.
김동명문학관 앞, 그리고 생가 앞뜰에 파초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선생의 대표작 〈파초〉가 떠오른다. 작품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파초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조국의 현실이었다. 지금 파초는 윤기 흐르는 넓은 잎을 자랑하며 꿋꿋하게 서 있다. 번갈아 바라본다. 선생과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선생이 어머니께 말한다. “어머니, 강릉 군수가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아니다. 아니다. 너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하지 않았느냐. 참 잘했다. 참 잘했구나.” 선생과 어머니가 손을 잡는다. 선생께서는 힘든 시절, 남국을 떠나 고통받고 있는 파초의 발등에 샘물을 길어 부었지만, 이 시대 우리는 그 파초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문학관을 떠난다.
문학관 주변 맛집 · 조부동막국수
문학관을 나와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부동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청솔공원으로 가는 한적한 길가에 위치해 있다. 보통 사천을 찾는 사람들은 사천항의 물회나 미역국 집을 많이 들른다. 문학관 관계자는 현지 주민들이 즐겨 가는 좀 색다른 이 막국수 집을 추천했다. 막국수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고 통닭이 서비스로 나온다는 점, 가족과 부담 없이 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는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크지 않은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 둘이 앉을 수 있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가을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메뉴는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 수제돈가스, 꼬막비빔밥으로 단출하다. 주인은 낯선 외지 사람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빔막국수를 주문했다.
조부동막국수 집 Ⓒ경향수
배추김치, 총각김치, 무절임, 어묵무침이 기본 반찬으로 나왔다. 정갈하다. 소개한 분이 말하던 옛날통닭 반 마리도 서비스로 나왔다. 이 집만의 특별한 서비스 메뉴다. 막국수를 준비하는 동안 맛보라는 따뜻한 배려인 듯하다. 제대로 튀겨 바삭바삭한 식감이 옛 추억을 소환한다. 아버지가 퇴근길에 들고 오신 노란 봉투 속 통닭, 식욕을 자극하던 그 사랑의 냄새, 바로 그 맛이다. 먹고 남은 것은 담아 가라고 홀 한편에 노란 봉투도 비치해 두고 있다.
이어 주문한 막국수가 나왔다. ‘지금, 막 만든 국수’라는 의미로 막국수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 집에서는 우선 시각적으로도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면발이 기름지고 양념장이나 고명이 소박하다. 별로 꾸미지 않는 것이 강원도 음식답다. 면수(麵水)는 따로 나오지 않는다. 양념의 단맛, 신맛, 매운맛에 메밀 향, 여기에 메밀만의 독특한 식감이 더해져 이 집만의 독특한 맛을 낸다. 맛의 비결은 역시 정성, 손수 면발을 뽑고 양념을 준비한다고 주인장은 강조한다. 2020년 문을 열어 4년째 운영하고 있다는데, 상호 조부동막국수의 조부동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좀 떨어진 강릉수목원 부근 판교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곧 이 지역의 순수한 전통 막국수 맛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이 집을 찾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마, 초허 김동명 선생은 객지를 떠돌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막국수 맛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방안 코쿨 불이 희미하게 타고 있는 추운 겨울밤, 밖에는 흰눈이 펄펄 날려 쌓이고……. 어머니의 옛 이야기를 들으며 막국수 한 그릇으로 긴 겨울의 허기를 달랬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울 엄마 손맛의 국수 한 그릇이 생각난다.”
경향수_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에이치에스라이팅 대표로 있다. 대학 시절 음악다방에서 DJ를 맡으면서 다양한 음악에 빠졌다. 회사에 입사해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많은 조리장을 만났다. 틈틈이 음악과 음식이 어울리는 글을 쓰고 있다.
춥고 긴 겨울을 보냈다. 3월 초순, 한발 먼저 봄을 맞고 싶었다. 순수한 동심으로 마음을 다독여준 이주홍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꽃은 아직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았지만 투명한 햇살과 맑은 바닷바람이 먼저 맞아준다. 아쉬운 마음으로 동래에 있는 이주홍문학관으로 향했다. 명륜역을 나와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향파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경향수가 석정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9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靑丘園 툇마루에 앉아부안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해 전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경향수가 만해문학박물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6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문학관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늘 고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