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폐기된 책이 태평양을 건너오다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에서 한국학 주제 전문사서로 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한국학 관련 자료를 선정하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주로 ‘bibliographer’ 혹은 ‘book selector’라 부른다. 수집 대상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와 해외 한인 사회를 아우르며, 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관련 연구서, 신문, 정부의 간행물 및 문서 등이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이 책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새로 들어온 자료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제목, 저자, 출판사를 살피는 일은 필자의 주요 업무이자 큰 즐거움이다.

책을 고르고, 한국에서 공수해온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건 내게는 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모험 같다. 제목, 저자, 출판사······ 단순히 정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상상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마 전, 배송 상자 속에서 오래되고 낡은 책 한 권이 내 눈길을 끌었다. 책의 표지에는 한국의 모 도서관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1980년대 시민운동 관련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 한국의 도서관에서 폐기되었다가 헌책방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필자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책생(冊生)이다 싶었다. 참고로, 미국의 대학 도서관은 웬만해서는 구입한 자료를 폐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정말 우여곡절 끝에 나와 만난 셈이다.

지식인, 출판사 들이 군사정권의 검열에 맞서 만들어낸 결과물들 

사실 나는 지난 20년간 ‘bibliographer’로서 장서 개발 차원에서 소위 '불온서적'이라는 특별한 책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해왔다. 불온서적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뭔가 음모와 스릴이 느껴지지 않는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군사정권 하의 검열을 뚫고 나온 책들이다.

이 책들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이론 번역서부터 북한 문학, 그리고 인권, 여성, 노동, 신학, 예술 등등······ 독재정권의 기분을 제대로 상하게 할 만한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이 어떻게 유통됐을까? 당연히 몰래! 비밀리에 학생, 노동자, 활동가들 사이에서 은밀히 읽혔다.

출판사들도 한몫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전설의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돌베개 같은 출판사들은 물론, 지금의 MZ세대들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녹두, 백두, 새길, 거름, 청사, 아침, 까치, 두레, 이웃, 전진, 청사 같은 이름의 출판사들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다. 이 책들의 저자와 번역자 중 일부는 오늘날 유명한 정치인, 작가, 학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책들 중에는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 원전을 저작권에 아무런 제약이나 허가 없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도 많았다. 감옥에 갇힌 운동권 대학생들이 번역 작업으로 긴 수감 시간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출판의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책이 나오면 곧바로 압수되거나 폐기되고, 출판사는 문을 닫고, 관계자들은 체포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독재정권에 맞선 지식인들의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결과물이었다.

‘불온서적’의 파란만장한 여정과 그것을 지켜내는 이들의 끝나지 않은 모험

생각해보면 이 불온서적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출판 검열과도 닮았다. 검열을 피해 출판과 유통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도서관들이 이 소중한 자료들을 폐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나섰다. 지금까지 2천여 권의 한국산 불온서적을 미국으로 가져왔고,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오늘날 이런 책들은 단순히 낡은 문헌이 아니다. 독재에 저항했던 역사의 증거이자,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던 자료들이다. 이 책들의 여정과 그것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나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모험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