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내게는 읽을 책이 부족했다, 아니, 거의 책이라고 생긴 건 교과서와 참고서 정도일 뿐이어서, 새 교과서를 받아들자마자 교과서의 지문들을 수도 없이 읽어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거의 외우다시피 하곤 했다.
우리 옆 동네는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담배농사 철이면 학교를 빼먹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배움보다는 생계가 우선이던 시절이었고, 고사리 손이나마 생계에 보탬이 된다 싶어 자식들을 학교가 아닌 담배 밭으로 데리고 가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세련됨을 갖추기엔 너무나 고된 삶이었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학구열이 높으셨지만 그런 부모님조차 자식들에게 따로 책을 사서 읽히실 생각은 못 하셨고, 교과서 외의 책은 필요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으셨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 문화적 환경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골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더 그랬지 싶다.
그렇게 책 읽기를 좋아했으나 책이 귀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 대신 집으로 배달되어 오던 농민신문과 새농민 잡지를 탐독해야 했다. 교과서 말고는 읽을 책이 없었으니까. 도시로 공부하러 나간 오빠가 간간이 사다 주던 문고판 서적들을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며 읽고 또 읽었다. 글자라고 새겨진 것들을 보면 그게 뭐든 무조건 읽고 다녔다.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허기를 달래기엔 독서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이렇게 문자가 인쇄된 책이 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오히려 그 이후로 글자만 보면 무엇이든 읽어 내려가야 하는 활자중독증 환자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롱 뒤에 숨겨놓고 온 동화책
그때 시골 학교에는 왜 학교도서관도 없었던 걸까? 요즘은 학교도서관도 쾌적하고 안락한 인테리어에 많은 장서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독서 지도를 해줄 사서교사까지 배치되어 있다. 거기다 요즘 아이들은 집에도 책이 넘쳐난다. 내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학교도서관이 있었다면, 나는 내 유년의 시절들을 그렇게 읽지 못해 안달하며 쓸쓸하고 외롭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어느 방학 때였던가. 오빠들과 서울에 있는 당숙네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꽤 부유하게 살았던 그 집에는 컬러TV까지 있었다. 그때 처음 봤던 컬러TV에서 방영되던 오색찬란한 만화영화의 황홀감과 그때 당숙모가 돼지고기를 잔뜩 넣어 끓여준 김치찌개 맛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 집에는 내 또래의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둘 있었는데, 그 애들은 멋진 책상과 책장도 가지고 있었고 그 책장에는 세계문학전집, 위인전집, 동화책 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으로 가득 찬 그 방은 나에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동화책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나를 꼼짝 못 하게 사로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읽다 만 책을 장롱 뒤에 살짝 숨겨놓고 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 집에 언제 다시 올지 기약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그때 왜 책을 빌려달라고 말하지 못했던가, 싶기도 하다. 지금도 장롱 뒤에 숨겨놓고 온 그 책을 생각하면 시골에 살며 불우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애잔해진다.
책 속에 파묻혀 사는, 행복한 활자중독증 사서
그러던 내게 도서관이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사서가 되었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도서관인이 된 지 33년 차가 되어간다, 여기 가도 책, 저기 가도 책, 원 없이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나는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어린 시절 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책을 읽고 또 읽으며 행복감에 빠져든다.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내게 책은 여전히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며, 내 행복의 원천이 되고 있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 이제 대도시 아닌 지역에도 훌륭한 시설의 공공도서관이 앞 다투어 생겨나는 추세이다. 또 인터넷으로 클릭 몇 번 만에 손쉽게 책을 구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독서인구는 갈수록 줄어든다고 한다.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서점에서는 이례적으로 ‘오픈런’까지 생겨났단다. 그 마음으로 계속해서 책에 관심을 갖고 책을 펼쳐든다면 어떨까?
90 나이에 무협지와 대하소설 읽으며 행복한 어르신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은 인구 3만 명이 조금 넘는 소읍에 위치해 있다. 도시에 비해 변변한 문화시설, 평생교육시설이 없는 지역이고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다수이다 보니, 대도시에 비례해 독서인구가 적은 실정이다. 논농사 짓고, 배농사 짓는 농민들이 도서관을 찾아오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들은 도서관에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방문해주고 계신다.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 그분들 안에 오래 쌓여온 문화에 대한 욕구를 풀고 싶어서일 것이다. 책을 못 읽어 독서 결핍증을 앓았던 나를 보는 것 같아, 나도 주민들이 책과 함께 마음껏 놀 수 있도록 독서 문화 프로그램을 공들여 기획하고 도서관을 문화 사랑방으로 활짝 열어놓는다.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위해 성인문해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책 읽는 행복에 빠져보시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90을 바라보는 어르신 한 분이 도서관에 처음으로 방문하셨다. 하도 무료해서 책이라도 좀 빌려보고 싶다고 하셨다. 회원 가입을 해드리고 도서관 이용 방법과 큰 글자 도서 등을 안내해 드렸더니 무협지가 읽고 싶으시단다. 내가 무협지를 읽어보지 못해 추천을 드리지 못하니 직접 책을 골라 가셨다. 그 뒤로 그 어르신은 책이 든 까만 봉지를 털레털레 들고 도서관을 찾아오셨다. 도서관에 있는 무협지를 다 읽으셨다 싶은 다음에는 대하소설을 시작하셨다. 도서관 기념품으로 나온 가방이 있기에 챙겨 드렸더니 당신은 까만 봉지면 된다고 마다하신다.
몇 년 후면 이제 책도 읽지 못할 때가 올 텐데…… 나는 그분의 나이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시작했을 독서, 그분이 읽은 책들로 하루하루 위로받기를, 그분이 읽은 책들로 그분의 하루하루가 더 빛나기를 기원하며 앞으로 10년 이상 도서관 이용자로 남아주시길 소망해본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이다. 다른 이의 경험을 훔쳐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 책의 종류가 인문학 관련 도서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써낸 여행서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내용의 SF소설이든, 내 마음을 파고드는 수필이든, 책을 읽는다는 건 나 혼자서는 하지 못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해주고, 직간접적인 치유의 매개체가 된다. 독서를 통해 나는 방황할 때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고, 마음이 아파올 때 그 누구에게서보다 더 큰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었으며, 지금의 가슴 따뜻한 내가 될 수 있었다.
요즘은 전자책의 인기가 하루하루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걸 다행히 여겨야 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종이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종이책이 주는 농밀한 느낌이 좋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다. 이제 책 읽는 습관으로도 세대가 구분되나 싶지만, 책 읽는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독서 인구가 감소하는 시점에서 책 읽는 행위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새해가 밝았다. 모든 이들이 올해의 버킷리스트에 ‘한 달에 책 몇 권 읽기’ 정도의 소망 하나 적어보는 건 어떨까? 혼자 떠난 휴가지에서 읽는 책은 얼마나 달콤하며, 추운 겨울날 따뜻한 침대에 누워 읽는 책은 얼마나 감미로우며, 단풍 지는 날 나무 아래서 읽는 책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책을 읽는다는 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에게로 떠나는 최상의 취미이며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창밖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거실 소파에 고요히 앉아 외롭고 쓸쓸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나긋나긋 책을 읽어주고 싶어진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는 작은 위로와 함께…….
문정숙_천안교육지원청성환도서관 관장
천안교육지원청성환도서관 관장. 도서관과 함께여서, 늘 책이 곁에 있어 행복한 사서. 걷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자기 자리에서 백조처럼 묵묵히 일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서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는 33년차 도서관인이다. 쓴 책으로 《문 사서, 도서관에 꽂히다》가 있다.
어린이를 평생독서가, 평생학습자로 자라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는 학교도서관,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맞춰 읽기 방식의 다양화를 도와야 한다. 자신의 색깔로 책을 만나는 학교도서관학교도서관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 10년 동안 학부모와 지역주민, 교직원, 아이들과 책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공통의 매개체로 인연이 되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다음으로 한국의 두 번째 노벨상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비극적인 역사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 《작별하지 않는다》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인간의 폭력
2024년 1월, 무려 20년 만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새로운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헬싱키의 38번째 도서관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깔라사따마도서관으로, 그냥 새로운 도서관인 것 말고도 재미있는 특징이 몇 가지 더 있다. 우선은,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의 도서관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대형 쇼핑몰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