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로 기억한다. 8년째 진행하는 책 이야기 프로그램(<YG와 JYP>)에서 한강 작가 특집을 한 적이 있다. 그 전해(2021년)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루면서 평소 흠모하던 이 작가 특집을 기획했다. 그 방송에서 어쩌다 이런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한국 작가 가운데 노벨상을 받는 첫 영예는 한강의 몫이 될 거라고.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알다시피, 그 호언장담은 불과 3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중에 100년쯤 지나고 나서 역사책의 2024년 한국사 연표에는 딱 두 사건이 기록될 가능성이 큰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이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한 사건은 12월 3일에 있었던 그 일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
한 온라인 매체의 서평 잡지 책임편집자로도 일해보고, 몇 권의 책도 내고, 무엇보다도 8년째 책 이야기를 일주일에 두 번씩 떠드는 독자로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의 수상으로 책 또 문학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출판시장의 모습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한강 작가의 책은 금세 100만 부가 넘게 팔렸지만, 노벨문학상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한국인이 갑자기 책을 사는 데 주머니를 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고서, 실용서를 제외하고) 1년에 한두 권 책에 쓰는 돈이 모조리 한강 작가의 작품에 쏠렸다고나 할까.
출판시장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도서관의 사정도 좋지 않다. 특히 재정이 어려운 지방정부는 도서관 지원 예산, 특히 도서 구입 예산을 줄이는 상황이다. 중앙정부가 올해(2025년) 출판 예산을 약 31억 원 늘려서 약 460억 원으로 정했지만, 도서 구입 예산과 같은 핵심만 놓고 보면 기대할 게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어떤 사람은 이런 푸념에 고개부터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같은 반응이다. ‘책이 안 팔린다고, 도서관이 황폐화한다고, 나아가 책 좀 안 읽는다고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길까?’ ‘1년에 책 한 권 안 읽어도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등.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책의 힘은 세다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각 분야에서 성취가 많은 사람 여럿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다 보니, 꼭 시간이 남을 때마다 “책 읽기는 좋아하세요?” “요즘에는 무슨 책을 읽으세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 놀랍게도, 그럴 때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긍정적인 대답을 준다. 기업인, 정치인, 관료, 과학자 등 직업의 분야도 다양하다.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흔히, 한국 출판의 황금기로 1980~90년대를 꼽곤 한다. ‘좋았던 그때’를 회고하며 미화하는 편향을 조심하더라도, 다른 매체와 비교했을 때 책의 힘이 탄탄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책의 힘이 셌던 때를 염두에 두고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흔히 외국에서 한국을 놓고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로 평가한다.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부모, 부모 세대가 고군분투한 결과가 산업화였다. 그렇다면 민주화는? 1970~80년대 책의 힘이 받쳐주지 못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민주화가 가능했을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드라마, 영화 그리고 K-팝에 이어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K-콘텐츠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는 1980~90년대 책의 힘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더라면 한강 작가도,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도, BTS도 세상에 등장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산업화와 그에 따라서 움직이는 현금이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준다면, 책은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개인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의 자산으로 넘쳐서 흐르게 된다. 그 결과가 민주화이고,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K-콘텐츠 열풍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질문이 나온다. 지금처럼 출판시장이 쪼그라들고 더는 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지금의 경험이 쌓인 미래는 어떨까? 책의 힘이 뒷받침하지 못한 25년 후 2050년의 한국의 모습은 지금보다 나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의 답은 부정적이다. 내가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전자의 경쟁력만큼이나 도서관 도서 구매 예산의 제자리걸음을 걱정하는 이유다.
쓸모없는 책이 빛나는 순간
중국 고전학자 리링은 인문학의 정체성을 ‘쓸모없음’이라고 보았다. 내가 보기에, 인문학의 정체성은 책과도 겹친다. 그러니까 책의 중요한 정체성도 ‘쓸모없음’이다. 방금 전까지 책이 정신적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민주화나 심지어 BTS의 토대라고 말해놓고서 ‘쓸모없음’이라니!
실제로 효용, 특히 당장 나오는 결과물을 따지기 시작하면 책만큼 쓸모없는 게 없다. 한 끼를 해결할 돈이 없는 소년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도서관의 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2017년, 2018년 연속해서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를 쓴 앤지 토머스가 했던 얘기다.
“여섯 살 때, 공원에서 두 명의 마약상이 총격전을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서부영화 속 장면 같았죠. 다음날 엄마가 저를 도서관에 데려가셨어요. 그날 눈앞에서 본 것보다 더 넒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죠.”
이렇게 책은 당장은 무용(無用)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넓은 세상’이나 ‘현실과 다른 세상’과 접속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앤지 토머스는 그렇게 어머니가 여섯 살 때 데려다준 도서관 덕분에 1988년에 태어난 또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흔히 그렇듯 10대 미혼모가 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렇다. 1980~90년대 지방도시에서 10대를 보내면서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 덕분에 이렇게 밥벌이하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한강 작가는 어땠을까?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한 강연에서 그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같은 묵직한 질문을 공유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아픈 현대사를 품은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는, 또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한국 정치의 혼란을 염두에 둔 작가의 통찰이 가득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내 식으로 바꿔보자면,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도 바로 책이다. 책은 정말로 힘이 세다.
*책 이야기 프로그램 <YG와 JYP>에서 다룬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강양구_지식큐레이터
지식큐레이터. 서울시미디어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 1997년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과학센터) 결성에 참여했다. 프레시안에서 과학ㆍ환경 담당 기자로 일했고,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과학의 품격》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핵발전소의 비밀》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가, 공저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 《과학 수다》 등이 있다. 팟캐스트 ‘YG와 JYP의 책걸상’을 진행하고 있다.
철 지난 과학책을 한국 독자들은 왜 그렇게 많이 읽을까?시대의 변화와 함께 MZ 세대가 새롭게 발견해서 읽어야 할 과학책들 최근까지 서울대학교 같은 대학에서는 자기소개서 항목으로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쓰기를 원했답니다. 그런데 입학 사정 교수들이 혀를 찰 정도로 지원자의 독서 리스트가 천편일률 똑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엔트로피》 《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다음으로 한국의 두 번째 노벨상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비극적인 역사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 《작별하지 않는다》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인간의 폭력
The Liverary에서는 2022년 9월 창간호부터 다독가들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로,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큰 연재물이다. 이번에 The Liverary 에디터 팀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