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서울대학교 같은 대학에서는 자기소개서 항목으로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쓰기를 원했답니다. 그런데 입학 사정 교수들이 혀를 찰 정도로 지원자의 독서 리스트가 천편일률 똑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엔트로피》 《총, 균, 쇠》 《사피엔스》 같은 책들입니다.
이런 책을 고등학생 또 MZ 세대가 읽는 이유는 학교, 도서관 등의 추천도서 목록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현장의 교사, 사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눠보면 이들도 《이기적 유전자》 《엔트로피》 같은 책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어렵게 읽고 나서도 이런 책이 과연 도움이 될지 확신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추천도서 목록에 있고,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그냥 권하는 것이죠.
이렇게 수년째 반복되는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답답합니다. 예를 들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스카이 캐슬> 같은 드라마의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추천도서 목록에서 꼭 과학 고전 1순위로 꼽히는 책이죠. 이 대목에서 반전이 있습니다.
철 지난 망상이 낳은 《이기적 유전자》
혹시 《이기적 유전자》가 언제 나온 책인 줄 아세요? 이 책의 원서는 1976년에 나왔습니다. 올해(2022년) 만으로 마흔다섯 살인 저보다 1년 먼저 세상에 나온 책이죠. 지금은 세상을 뜬 스티브 잡스가 스물한 살 때인 이 해에 애플을 창업하고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세상에 선보인 시점입니다. 당시의 애플 컴퓨터와 아이폰의 차이만큼이나 세상도 과학도 변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견뎌냈으니 ‘고전’이라고요? 아닙니다. 일단 저자 도킨스부터 한국에서 《이기적 유전자》가 많이 읽힌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도킨스를 두 번이나 직접 만나 인터뷰했던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에 따르면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한국에서 그 (철 지난) 책이 왜 아직도 많이 팔리는 줄 모르겠다. 그 책은 내 대표작도 아니다.”
저자인 도킨스보다 《이기적 유전자》를 높이 평가하는 한 과학자의 얘기도 들어보겠습니다. 한국 과학자 최초로 미국에서 진화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서 지금은 경희대학교에서 연구하는 전중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과학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대학원생도 쉽지 않은 일인데 중고등학생이나 일반인이 이 책을 왜 이리 좋아할까요?”
저는 이 두 과학자보다 《이기적 유전자》에 훨씬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얕았던 1970년대의 ‘유전자 중심주의’ 혹은 ‘유전자 환원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과학자 다수는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전자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능 유전자’, ‘키 유전자’, ‘비만 유전자’, ‘바람둥이 유전자’, ‘게으름 유전자’ 등. 책 제목이 ‘이기적 유전자’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죠. 하지만 2003년에 마무리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와 그 이후의 연구 성과 탓에 이런 기대는 깨졌습니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는 인간의 유전자가 약 2만 개 정도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초파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하나의 ‘비만 유전자’ 따위는 없었습니다. 무려 30억 쌍의 DNA 염기서열 여기저기 안에 흩어져 있는 유전 정보와 먹을거리 섭취, 운동과 스트레스 여부와 같은 환경 요인이 상호작용하면서 뚱뚱하고 날씬한 결과가 나타날 뿐입니다. 중요한 요인이 유전(본성)인지, 아니면 환경(양육)인지, 생명 현상의 복잡한 실체가 드러날수록 딱 부러지게 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지금까지 《이기적 유전자》를 학교나 도서관 추천도서 목록에 아무런 의심 없이 올렸던 일이 부끄러워질 법합니다. 오죽하면 교사나 사서 선생님께 도움을 드리고자 제가 과학 고전 스물세 권을 다시 선정하고 해설해서 내놓은 《강양구의 강한 과학: 과학 고전 읽기》(문학과지성사)에서 《이기적 유전자》를 MZ 세대는 ‘읽을 필요가 없는 책’으로 분류해놓았겠어요?
무지한 비전문가의 궤변 《엔트로피》
기왕 얘기를 꺼냈으니, 《엔트로피》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강양구의 강한 과학》에서 《엔트로피》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과학’ 고전이라고 할 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인 ‘엔트로피’를 저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부정확하게 사용한 엉터리 책입니다.
그럴 만합니다. 이 책의 ‘유명한’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경제학과 국제관계학을 공부했습니다. 과학 특히 엔트로피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물리학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요. 자신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즉 과학적으로 포장하고자 엔트로피 개념을 가져왔을 뿐이죠.
요즘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물리학자 김상욱 경희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엔트로피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정이다 보니 리프킨의 《엔트로피》같이 엔트로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 과학 고전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엔트로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은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아니라 데이비드 린들리의 《볼츠만의 원자》를 읽어야 한다.”
평소 점잖기로 유명한 김상욱 교수가 이 정도로 말했으니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얼마나 한심한 책인지 감이 왔을 겁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을 전공하려는 예비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엔트로피 개념을 알고자 《엔트로피》를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저라면 《엔트로피》 대신에 《볼츠만의 원자》(승산)와 함께 폴 센의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매일경제신문사) 같은 책을 권하겠습니다.
대안은 많고 많다
《이기적 유전자》 이후에 나온 좋은 과학책이 한두 권이 아니니 대안도 많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만 몇 권 꼽아보겠습니다. 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바다출판사)는 지난 40억 년간 생명의 진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놓고서 지금까지(2020년까지) 과학자가 밝힌 여러 내용을 요령 있게 정리했습니다.
유전자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고요? 싯다르타 무케르지가 2016년에 펴낸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까치)가 국내외 여러 전문가가 가장 먼저 꼽고 대중에게 권하는 추천도서입니다. 이 책과 함께 국내 저자 조진호가 공들여 쓰고 그린 《게놈 익스프레스》(위즈덤하우스) 같은 그래픽 노블도 있습니다.
힐러리 로즈와 스티븐 로즈 부부는 1960년대 말부터 영국에서 시작한 이른바 ‘급진 과학 운동’의 리더입니다. 이들이 저명한 원로 과학자가 되고 나서 현대 생명과학을 정리한 《급진 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바다출판사)는 《이기적 유전자》 식의 접근이 왜 ‘DNA 망상’일 뿐인지 설득력 있게 비판합니다.
《엔트로피》를 놓고서는 앞에서 《볼츠만의 원자》와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를 대안으로 권했었죠? (순서는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를 먼저 읽고 《볼츠만의 원자》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이 책들을 읽고서 좀 더 딱딱한 과학책으로 엔트로피 개념을 공부하고 싶다면, 스티븐 베리의 《열역학》(김영사)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2021년에 제가 펴낸 《강양구의 강한 과학》의 뒷부분에는 과학책을 읽으려는 분들을 위한 가이드까지 덧붙여놓았습니다. 이제 제발 과학 도서 추천 목록에서 《이기적 유전자》와 《엔트로피》를 삭제합시다. 다른 과학기술 분야의 추천도서가 궁금하다면 다음 기회에 또 다른 책을 추천해보겠습니다.
강양구_지식큐레이터
지식큐레이터. 서울시미디어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 1997년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과학센터) 결성에 참여했다. 프레시안에서 과학ㆍ환경 담당 기자로 일했고,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과학의 품격》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핵발전소의 비밀》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가, 공저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 《과학 수다》 등이 있다. 팟캐스트 ‘YG와 JYP의 책걸상’을 진행하고 있다.
2022년 2월로 기억한다. 8년째 진행하는 책 이야기 프로그램(YG와 JYP)에서 한강 작가 특집을 한 적이 있다. 그 전해(2021년)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루면서 평소 흠모하던 이 작가 특집을 기획했다. 그 방송에서 어쩌다 이런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한국 작가 가운데 노벨상을 받는 첫 영예는 한강의 몫이 될 거라고.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우리 반 아이들은 읽는다중학생인 우리 집 아들놈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고 아빠가 소설을 쓰는데도 아들은 책과 거리가 멀다. 책 좀 보라고 하면 아들은 해맑은 얼굴로 “나중에 보고 싶은 거 생기면 얘기할게” 하고는 그만이다. 가끔 뭘 읽었다고 해서 물어보면 일관되게 대충이다. 나였으면 며칠에 걸쳐 읽었을 두꺼운 소설을 두어 시
The Liverary에서는 2022년 9월 창간호부터 다독가들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로,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큰 연재물이다. 이번에 The Liverary 에디터 팀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