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서 남한산성 남문 방향으로 오르는 산길은 낭만적이다. 봄이면 좌우로 길가에 벚꽃이 만발해 터널을 이룬다. 5월, 눈부신 녹음인가 하면 어느새 단풍이 온 산을 곱게 물들인다. 한겨울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찬바람은 오히려 상쾌하다. 산성의 오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절은 무심하게 오고 간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 생태, 건강과 힐링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은 남한산성은 세계유산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역사 현장이다.
웅장한 성곽과 문루, 성안 곳곳의 문화재, 여기 스민 애국과 충절의 정신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곳이 남한산성이기도 하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행궁이나 현절사, 청량당 등의 존재 기반은 관련 인물들의 ‘기여(寄與)’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크든 작든 의미 있는 일,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함으로써 발전과 향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긍정 에너지가 기여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남한산성 여러 문화재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기여가 존재한다. 기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오래 기억하고 전승하게 된다. 만해기념관은 남한산성에서 만나는 빼놓을 수 없는 기여의 공간 중 하나다. 만해가 그렇고, 만해기념관을 설립하고 평생 만해정신을 알리기에 힘써온 전보삼 관장 또한 그렇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 성곡리에서 태어나 1944년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독립지사로, 승려로, 시인으로 살아온 생애는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확고한 신념과 실천, 수행과 깨침의 과정이었다. 일찍이 조지훈 선생은 ‘민족주의자 한용운’이라는 글에서 애국지사, 불학(佛學)의 석덕(碩德), 문단의 거벽(巨擘),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았을 때 만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지사로서 선생의 강직하던 기개, 고고한 절조는 불교의 온축과 문학 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 쌍수의 종장(宗匠)으로서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운동과 서정시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한용운전집 4》, 신구문화사, p. 362)
만해의 무엇이 우리를 끌어들이는가? 무엇이 그를 따르고 흠모하게 하는가? 그것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삶의 태도다. 강열한 불꽃같은 자주독립정신이 있었고 타협하지 않는 절조가 있었다. 일체의 부정이 스며들지 못하는 곧은 절의 정신이 있었다. 만해는 어려운 시대를 그렇게 살았다.
산성 남문을 지나 남문로터리 주차장을 끼고 왼쪽으로 몇 백 미터 오르다 보면 만해기념관이 반긴다.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92번길 24-7. 여초 김응현 선생이 광개토대왕비문체로 쓴 ‘만해기념관(萬海紀念館)’ 팻말이 기운차게 서 있다. 한 걸음 건물 입구로 다가가면 1세대 조각가 민복진 선생의 작품 만해 흉상이 모셔져 있다. ‘만해한용운지상(萬海韓龍雲之像)’이라 쓰인 좌대 위에 안치된 흉상은 언제 보아도 의연한 자태다.
만해기념관은 전보삼 관장 개인의 의지와 신념으로 설립 운영되는 대표적인 사립 기념관이다. 지연, 학연 등 세속 인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만해를 알아가는 것이 좋았고, 그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것이 좋았고, 그가 추구했던 생각과 철학이 좋아서였다. 또 새롭게 찾아내고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전관장이다.
기념관은 일찍이 1981년 10월 만해가 만년을 보낸 성북동 심우장에 개관했다. 현재의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한 것은 1998년 5월이다. 산성에서만도 30년이 가깝다. 오로지 만해만을 생각하며 가장 절실하고 간절하게 선생을 찾고, 그 정신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온 세월이다.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생각하고 실천했다.
정성으로 수집한 한 점 한 점이 모여
기념관 1층에 위치한 상설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공간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정돈되어 방문자를 맞고 있다. 디지털미디어실을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연결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생애와 활동, 교유와 장소, 사상과 영향 관계 등 종합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구성 전시하고 있다.
중앙 유리 케이스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기번호 제25호), 1926년 회동서관에서 발행한 《님의 침묵》 초간본을 비롯해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정선강의 채근담》 《십현담주해》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 등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만해가 세상을 넓게 보고 꿈꾸게 했던 《영환지략》 《음빙실 문집》 《통감》 등의 서적과 경허 스님, 박한영 스님 등 교류했던 인물의 사진 자료도 눈에 들어온다.
지금 유리 상자 속으로 만해의 저서들을 만나고 있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만해가 바라본 당대의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고 여러 단계를 거쳐 정제된 사상의 농축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서들은 연구의 기반이 되었고, 새롭게 편집되어 또 다른 독자들을 만났다. 만해 연구서와 새로 편집해 출판된 여러 종의 책들도 전시하고 있다. 모인 국내외 책과 논문이 《한용운 연구》(통문관, 1960) 외 약 2천 500여 편에 이른다. 올해 탈고 100년을 맞는 《님의 침묵》 판본 200여 종도 전시하고 있다.
디지털미디어실에서는 만해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영상 이미지로 만날 수 있다. 약 300여 점의 아날로그 소장품을 고화질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해 관람객에게 시각적 몰입감을 제공한다. 40여 점의 주요 소장품은 전보삼 관장이 직접 해설한 동영상으로 제작되었다. AI 기술을 활용해 만해의 명언을 음성으로 재현한 AI 기반 만해 명언 콘텐츠는 관람객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상을 전달하고, 상호작용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전시품 하나하나 사연이 있다. 천천히 만해와 대화를 나누며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교육사, 학예사가 상주하고 있어 자세한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기념관에서는 매년 창의적 기획전을 개최해 전시 자료를 확대 생산하고 있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치밀한 사전 조사와 연구 과정을 거쳐 기획전을 개최한다. 만해의 생애, 작품, 사상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거나 그 주변으로 범위를 확대해 진행하는 수준 높은 기획전은 관람객의 재방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4년 ‘만해와 그 제자들’을 시작으로 현재 73회의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
만해의 작품, 정신을 핵심으로 하는 한글 사랑, 설중매, 옥중 한시, 독립운동, 심우장 사람들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있었고, 스승과 제자를 다룬 만해와 춘성, 만해와 경봉, 석전과 만해, 만해와 석주, 오세창, 최범술 등의 기획전도 가졌다. 또한 남한산성, 광주와 관련된 고문서 특별전, 남한산성 다큐멘터리 사진전 등도 개최했다. 뿐만 아니라 기증 유물전으로 ‘전길수 선생 기증 유물전’ 등을 개최한 바 있다.
만해기념관에서 역점을 두어 추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만해학교’다. 만해정신의 이해와 확산을 목표로 일반인이나 가족 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이 교육 프로그램은 4, 50명 단위로 하루 여섯 시간 진행된다. 참여자의 만족도가 높은 이 프로그램은 지난 해 29회를 마쳤다. 만해정신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정신 수양 프로그램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만해의 애국정신과 문학정신 선양을 목표로 만해문학백일장도 진행된다.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시, 시화 두 분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느낀 만해를 표현해보는 창작 프로그램이다. 10회째 시행했고 시화는 전시회도 갖는다.
만해기념관이 걸어온 40년 넘는 구도의 세월은 ‘만해정신의 확산에 기여’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쉼 없이 기여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만해기념관은 이제 남한산성의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기념관을 나와 최동호 선생이 쓴 ‘꽃 한 송이 기리는 삼월의 노래’ 시비 앞에 선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겨울 설악산 서릿발 사나이가
獄中에서 홀로 부른 沈默의 노래가
民族의 聖地 남한산성에
천만 송이 붉은 꽃으로 피어나게 하여라
문학관 주변 맛집 · 백제장
남한산성은 닭볶음탕으로 더 알려진 때가 있었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시원한 계곡물,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닭도가니, 닭볶음탕, 닭백숙 등이 주 메뉴였고, 엄나무, 능이, 황기 등 부가 재료를 추가해 특색 있는 맛을 내어 인기를 끌었다. 많은 닭요리 음식점들이 산성 아래로 이주해가고 다양한 음식점과 분위기 있는 카페가 시류에 따라 들어왔다.
70년 역사를 가진 한정식 전문점 백제장은 역사성으로 보나 음식 맛으로 보나 남한산성의 대표 음식점 중 하나다. 만해기념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 로터리에서 북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고택 3동으로 꾸며진 이 음식점은 68년째 2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다. 뒷담을 따라 수어장대로 오르는 옛길은 운치가 있다.
상호 ‘백제장’은 부근에 온조대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 붙인 것 같다. 2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지만 대표 음식은 한결같이 한정식이다. 기본 메뉴 산채정식에 숯불불고기, 숯불더덕구이, 옛날 맛 녹두빈대떡 등을 추가로 주문할 수 있다.
푸짐하게 차려진 산채정식은 이 집의 긴 세월만큼 한 상 가득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각종 산채나물을 비롯해 생선, 닭볶음, 호박된장찌개, 도토리묵 등 25가지 반찬을 기본 구성으로 하고 있다. 인공 조미료를 최소화해 자연의 맛을 살려내려고 했다 한다. 제철 음식 재료의 사용은 물론, 음식 보관을 재래 방식인 토굴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맛의 비결이라고 한다.
밥은 찰기가 돌고 잡곡이 가미되어 영양 만점의 건강식이다. 숯불불고기와 더덕구이는 이 집만의 일품요리이다. 한옥에서 즐기는 한국 음식의 정갈한 맛, 대중화된 한국 전통음식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국적인 맛과 분위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창경_신구도서관재단 이사, 수필가
신구도서관재단 이사, 한국출판학회 고문, 수필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추강 남효온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4년 《문예운동》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1989년부터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 교육, 출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연구에 힘써왔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사)아시아민족조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 《함께 걷는 책의 숲》과 《세계의 식물원 산책 1》(공저)이 있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5월호(첫 회)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탄, 해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12월 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연말이 다가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10월호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난여름 한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