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도 하고 영문학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독서모임도 하고, 참 다양한 일을 하시네요.”
처음 만난 이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참 다양한 일을 한다는 말. 대체로 나는 하하, 그렇다고, 단 하나에 매섭게 몰두하는 편이라기보다는 이 일에서 저 일로 철새나 물고기처럼 이동하면서 나 스스로를 조금씩 변모시키는 쪽을 더 편안해한다고, 명징한 전문성이나 정체성을 요하는 시대에 어쩐지 다소 반대로 살고 있다며 약간의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 답하는 편이다. 뉘앙스는 매번 다르지만 그들 말의 틈새에서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쉽사리 파악이 안 된다는 갑갑함이 날카롭게 느껴질 때가 있고, 그 기저에는 묻는 이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불안이 자리한다. 뭐하는 누구입니다, 어디 속한 아무개입니다, 라고 간편한 요약이 가능한 삶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데도 은연중에 타인의 복잡한 면면을 단순화하여 판단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빠르고 편리한 이해에 도달함으로써 사유를 끝마치고 싶다는 무의식 말이다.
물론 번역과 영문학 공부와 글쓰기와 독서모임은 양상에 있어서는 지극히 다를 수 있다. 번역을 할 때와 글쓰기를 할 때는 지극한 침묵이, 소음 없는 환경이 필요하다. 다만 번역할 때는 원문의 저자를 향해 닿지 못할 편지를 쓰는 것과 같은, 엄연한 시차 속 일방향적인 대화를 건네는 심정이 된다. 다른 한편 글을 쓸 때는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문학 공부에 있어서는 또렷한 연구 방향과 더불어 너른 지적 호기심이 필요하며, 독서모임 진행자로서는 모든 참여자에게서 대화와 질문을 이끌어내고 말하기를 조율하는 다양한 방법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을 참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책 혹은 문학과 관련된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각각의 활동 혹은 작업에 사용되는 감각의 방향성은 다르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실로 그러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실로 그러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 그것이 이 모든 다채로움과 울퉁불퉁함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다.
4년 전, 박경선 번역가가 연 ‘읽기로서의 번역’ 수업을 들으며 여름을 났다.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 말과활아카데미에서 번역을 하고 있거나 번역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 5~7페이지 가량의 영어 텍스트를 8주에 걸쳐 읽고 그중 미리 채택된 한두 단락을 한국어로 번역해 제출한 다음, 박경선 번역가의 진행 하에 서로의 번역본을 함께 읽고 코멘트와 크리틱을 세 시간여에 걸쳐 나누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첫 소설 단행본 계약서를 받아든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까마득한 초보 번역가였지만 나름대로는 번역의 원칙을 갖고 있다고 어렴풋이 믿었는데, 번역이야말로 책을 가까이해온 이래로 가장 붙잡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수업이 으레 그러하듯 내 어설픈 믿음은 매번 산산조각 났다.
당시 내가 번역에 관해 지니고 있던 원칙들은 이러했다. 원저자가 지닌 목소리를 최대한 따를 것, 도착어 가독성이 좋게끔 임의로 끊거나 변형해 번역하기보다는 출발어 문장 특유의 톤이나 스타일까지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할 것, 의역은 되도록 지양하고 다소 낯설게 읽히더라도 직역을 고수할 것. 이 원칙들이 산산조각 난 것은 내 번역이 유달리 서툴기 때문도, 다른 이들의 결과물에 못 미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참여자의 번역이 매번 나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천차만별이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번역이 ‘옳다’고, 혹은 좀 더 타당하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었다. 분명 똑같은 텍스트를 읽었는데도 단어 선택부터 한 문장의 구조를 엮고 연결하는 방식, 앞뒤 문장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방식, 원문의 톤을 해석하는 방향이 몹시도 달랐다. 그 다름을 매번 마주하는 심정은 얼얼하고 아찔했다. 이 대사가 이렇게 번역된다고? 이런 단어를 쓴다고? 이렇게 문단을 재구성한다고? 백 명의 번역가가 있다면 백 개의 번역본이 있다는 말을 어느 겸손한 번역가의 은유쯤으로 여겼던 나는 뒤통수를 대차게 얻어맞았다. 백 명의 번역가가 있다면 실제로 백 개의 번역본이 있다. 내 번역은 물론 내게는 지극히 타당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 그것이 이 모든 다채로움과 울퉁불퉁함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다.
동네 책방에서 매번 다른 참여자들과 매번 다른 책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도, 대학원 강의실에서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좋아하는 작품의 옛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비교해 읽으면서도, 그러니까 여러 방식의 독서를 경험하면서 나는 내내, 매번 이 진실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실로 그러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 선험적인 답도 없고 어떤 절대적 기준 하에 더 나음과 못함도 없고 그저 차이의 파편들이 난무할 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의 진실이 당신에게는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엄준한, 아득한, 가끔은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이토록 까마득한 주관성과 자의성들이 구체적으로 맞붙고 튀어 오르는 장으로서의 독서라니, 얼마나 지난한가. 그리고 흥미로운가.
‘다름’의 불편함을 동반한 성찰의 독서, 그리고 치유
4년 전 여름의 기억을 오래도록 곱씹어보며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무척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차이들을 마주하는 것임을 최근에야 겨우 깨닫는다. 독서를 즐기는 많은 이들은 그 어떠한 답도 쉽게 내주지 않는 책,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또 그렇지만도 않은 어떤 혼란한 틈새의 순간들을 내보이고 그를 통해 독자를 아득하게 만드는 작품, 그러니까 단순명료한 이해가 도통 불가능해지며 한 줄 요약이라는 가성비적 소비가 통할 리 없는 시간을 내심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 막막하면서도 아찔한 시간은 결국 우리를 다른 모양으로 빚어내므로. 독서를 통해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수월하고 안락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다르다’라는 인식으로 인한 불편감을 동반하는 성찰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므로.
물론 이러한 작품과 독서는 취향의 영역으로 분류되기도 하므로 이른바 ‘난해한’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서의 핵심은 결코, 간결한 메시지를 명징하게 전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세상만사 그렇게 똑 떨어지고 옳고 그름이 케이크 조각마냥 어여쁘게 잘라졌다면 우리에게 독서는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책, 특히 문학이야말로 복잡하고 지리하고 다층적인 인물들과 세계를 꼭 그만큼 복잡하고 지리하고 다층적으로 제시하는 매체-장르 아니던가. 언제나 반짝이는 것은 틈새에 있다. 언뜻 보면 지나치기 쉬운 곳에, 곱씹지 않으면 기억에서 곧장 스러지는 장면 속에, 자칫 별 생각 없이 지나치게 되는 범속한 얼굴이나 눈빛 속에. 책만큼이나 사람도, 장면도, 세상도.
틈새의 편린, 새로움의 차이를 마주할 때 확장되는 이해의 반경
백 명의 독자-번역자가 있다면 백 개의 독서-번역본이 있다.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그 알쏭달쏭함이란, 섣부른 판단을 지혜롭게 유보시키며 숙고를 가능케 하여 결국은 더 너른 이해에 도달하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면 쉽사리 삿대질하려는 마음을 물릴 수 있고, 비난과 모욕의 언어를 내뱉기 전에 한 번 더 삼킬 여유를 품을 수 있다. 줄거리를 흡수하고 ‘글쓴이의 의도’를 달달 외워 유창하게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한 권의 책을 한 명의 타인을 만나듯 찬찬히 읽음으로써, 도통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그 감상을 다른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나눔으로써 반드시 ‘새로움’의 편린을 줍게 되며, 그 새로움을 차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여력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책을 읽기 전의 당신과는 달라진 누군가다.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언제부턴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다양한 방식과 양상의 독서를 통해 나의 몸-마음이 끝없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 새로움을 차이 그 자체로 받아들임으로써 이해의 반경을 아주 미미하게라도 넓혀가는 일이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납작하게 소비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몹시도 강해 이토록 울퉁불퉁하게 살아가는 만큼, 나 역시 타인을 결코 납작하게 소비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매번 새롭게 다짐하듯 품어보는 셈이다. 물론 앞으로도 나는 묘한 뉘앙스로 날아오는 참 다양한 일을 하시네요, 라는 말에 하하, 그렇다고 약간의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 답하겠지만, 그 말의 틈새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 다양하긴 하지만 사실 다양하지만도 않다고. 결국 계속해서 차이의 벌판을 맞닥뜨리고 그 벌판을 휘적휘적 걸으며 반짝이는 무언가를 주울 따름이라고. 그렇게 주운 파편을 다시금 사람들과, 세상과 나누며 찰나의 빛을 품고 싶다고.
최리외_번역가
영문학 박사과정 공부와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다. 번역과 낭독 작업, 동네 책방 독서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장르를 불문하고 써온 글을 엮은 첫 책 『밤이 아닌데도 밤이 되는』을 냈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Y/N』 『벌들의 음악』 『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멀고도 가까운 노래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모녀 서사의 의의를 '어머니-빌런'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비평적인 글을 『악인의 서사』에 실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읽는다중학생인 우리 집 아들놈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고 아빠가 소설을 쓰는데도 아들은 책과 거리가 멀다. 책 좀 보라고 하면 아들은 해맑은 얼굴로 “나중에 보고 싶은 거 생기면 얘기할게” 하고는 그만이다. 가끔 뭘 읽었다고 해서 물어보면 일관되게 대충이다. 나였으면 며칠에 걸쳐 읽었을 두꺼운 소설을 두어 시
과학교육의 목표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과학 소양과 과학적 소양을 기르는 것과학교육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어린이와 청소년이 과학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길 기원하며 다양한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방안을 고민해왔습니다. 시대에 따라 과학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서술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긴 해도, 결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과학 소양(science lite
The Liverary 석학 인터뷰는 우리 시대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을 모시고 삶과 독서에 관한 풍성하고도 깊이 있는 경험과 철학을 나누고자 기획했다. 2024년의 첫 석학 인터뷰에서 만난 분은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다. 최인철 교수는 심리학자로 14년째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고, 2022년 정신건강 관리 스타트업 ‘굿라이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