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3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가 열렸다. 1900년대 세기 전환기 속에서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등 ‘빈 분리파’를 중심으로 모더니즘 미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은 사진기의 발명으로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재현적 작업에서 벗어났다. 폴 세잔과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 빈 분리파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실제 사물을 묘사하는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했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을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를 추상적이고 고유하게 그려나갔다.
흥미로운 건 빈 분리파의 대표 주자인 에곤 실레가 1907년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그 당시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낙방했다는 것이다. 입학 나이가 16살이었던 에곤 실레는 32살 나이 차가 나는,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클림트로부터 제자가 아닌 동료로 인정받았다. 이후 히틀러는 1908년에도 빈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지만 낙방을 하면서 빈을 증오하게 된다. 가난했던 히틀러는 빈의 풍경화를 그려 파는 것으로 겨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1) 1889년에 히틀러가 태어나고 1년 후에 에곤 실레가 태어났기에 그 둘은 같은 시기에 빈에 거주했을 것이다. 거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에곤 실레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고, 히틀러는 낙방했을까. 에곤 실레와 히틀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과연 어떻게 달랐을까?
에곤 실레와 히틀러의 풍경화를 보면 둘이 추구하는 그림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에곤 실레가 그린 〈작은 마을 III〉에서는 마을의 고립감과 소외감이 잘 나타난다. 빈 틈 없이 붙어 있는 어두운 색조의 지붕은 마을에서 느낀 에곤 실레의 답답함과 우울함이 드러난다. 비현실적인 느낌의 갈색으로 흐르는 강이 주택가를 가로지르고 있다. 반면 히틀러가 그린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작가의 개성이 들어 있기보다는 사실대로 잘 그려졌다. 또한 산을 깎아 만들어서 우뚝 솟은 성의 모습에서 웅장함과 위압감이 드러난다. 실제로 조화와 균형이 잡힌 미술 작품을 좋아한 히틀러는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으며 “파르테논 신전이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여겼”2)다. 전위적인 예술을 추구해나간 빈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붓을 내려놓은 히틀러는 총을 들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다. 전후 패전국이 된 독일에서 히틀러는 대중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예술을 정치로 이용했다. 나라의 질서와 균형을 잡는다는 명분의 문화 정책을 통해 건축가들은 “단순한 선을 사용”하게 했고, 음악가들은 “무조 음악이나 재즈가 아닌 조화로운 멜로디를 작곡해야”3) 했다.
빈 분리파에서 ‘분리’는 낡고 나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틀러가 추구한 고전주의적 예술의 성향과는 상반된다. 대표적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큰 포플러 나무 II〉를 보면 빈 분리파가 추구했던 표현주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림 속 포플러 나무는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주변의 먹구름에 맞서고 있는 포플러 나무의 잎은 클림트가 점을 하나씩 찍어서 그렸다. 한 평론가는 “반짝이는 듯한 잎의 표현이 ‘송어의 비늘’ 같다고 평했다고”4) 한다.
에곤 실레의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를 보면, 그에게 나무는 바람에 휘어지는 하나의 육체 같다. 가느다란 기둥과 가지를 가진 채로 나무는 바람에 힘껏 저항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곤 실레의 마음이 나무에 투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무를 둘러싼 배경은 온통 회색으로 침울한 기분을 준다. 에곤 실레는 삶이라는 배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힘껏 몸을 뻗는 무용수처럼 나무를 그렸다.
에곤 실레는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자아를 탐구해나갔다. 나르시시트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 그의 자화상에는 늘 불안과 고독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자화상에서 표현되는 얼굴의 붉은 점은 자신이라는 존재의 떨림을 보여준다. 에곤 실레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아이로 여겨졌다. 그의 외삼촌과 아버지는 에곤 실레가 그들과 같은 기술자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에곤 실레는 미술 외의 과목에는 관심이 없었다. 역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곤 실레가 15살 때 매독을 않으며 일찍 죽었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에게 냉담했다는 것이 에곤 실레는 놀랍고 두려웠다. 그에게 미술은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죽음 같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공포 속에서 불안을 내밀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욕망의 표현 수단이었다.
〈어머니와 아이〉를 보면 어두운 배경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품에서 화들짝 놀란 채로 정면을 바라보는 아이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지만, 아이의 손은 허공으로 뻗은 채 멈춰 있다.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아이는 그 말 역시도 꺼내기 어려운 상태인 것 같다. 모녀를 둘러싼 배경은 어둡게 칠해져 있다.
1918년 2월 6일 클림트는 그 당시 유럽을 강타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에곤 실레는 1918년 3월 1일부터 4월 1일 열렸던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 포스터는 에곤 실레가 1918년 제작한 〈친구들(원탁)〉이라는 작품을 변형한 것이다. 포스터 속에서 빈 분리파 동료들은 책을 읽고 있다. 두 그림의 차이가 있다면 맨 밑의 한 자리가 〈친구들(원탁)〉에는 채워져 있지만, 전시회 포스터에는 비워져 있다. 그 자리는 클림트의 것으로, 에곤 실레가 사망한 클림트를 애도하는 의미로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에곤 실레도 클림트가 사망한 바로 그 해, 1918년 10월 31일에 생을 마감한다. 이후 빈 분리파 화가와 그들의 작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빈 분리파 화가들 다수의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로 인해 퇴폐미술로 인식되게 된다.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문화역사가인 프레더릭 스팟츠가 쓴 《히틀러와 미학의 힘》은 히틀러가 ‘미학’을 활용해서 자신의 통치를 문화적 차원에서 정당화한 과정을 보여준다. 히틀러는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작업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국민을 위해 작업해야”5) 한다고 말했다.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예술을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히틀러는 대중문화 정책을 통해서 “전황이 악화될수록” 국민들이 “더욱 문화적 배출구를 갈망”6)하도록 했다. 이 모습은 1980년대에 전두환 정부가 군사독재로 인한 국민들의 반발을 억제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스포츠와 스크린에 관심을 가지게 한 우민화정책과 많이 닮아 있다.
또한 히틀러는 빈 분리파가 추구했던 모더니즘을 혐오했다. 히틀러는 “모더니스트 미술이 사회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했고 모더니스트를 두고 “그런 흉물을 만들어낸 이들이 정신병원이 아닌 예술 작업실에 거주한다”7)라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1937년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을 열어서 공개적으로 큐비즘, 다다이즘, 표현주의 등을 ‘타락한 예술’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퇴폐미술 전시회에는 대표적으로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빈 분리파로 활동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있었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양쪽에서 본 자화상〉은 ‘퇴폐미술 전시회’에 전시되고, 그 전시회의 영향으로 결국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1923년 드레스덴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자신의 두 얼굴을 하나로 합친 것으로 입체주의적인 표현법을 보여준다.8) 독일에서 그의 작품은 퇴폐미술로 간주돼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조차 금지되었다. 코코슈카는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해 1946년 영국 시민권을 얻은 후에 나치주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터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9)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내 의지와 달리 정치인이 되었다”라고 그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만일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있었더라면 나는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예술가나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10)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히틀러가 미술에 재능이 있었더라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는 미술에 재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도 권력적이었다. 그에게 예술은 자신을 내밀하게 표현하고 세상에 없던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관람객을 만드는 것이 아닌, 권력을 이용해 관람객으로 대변되는 국민을 선동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히틀러가 재능을 인정받아서 예술가가 되었더라도,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끔찍한 일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오늘날에 있어서 에곤 실레를 비롯한 빈 분리파 작가들이 히틀러와 반대의 방향으로 갔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에곤 실레와 클림트의 그림 안에는 누드화를 포함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그림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의 에로티시즘에 기댄 욕망의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나는 창조자이자 창조물입니다. 나의 예술 속에서 나를 발견합니다.”
각주
1) *프레더릭 스팟츠 지음, 윤채영 번역, 《히틀러와 미학의 힘》, 생각의 힘, 2024, 1부 1장 보헤미안 예술 애호가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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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도 하고 영문학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독서모임도 하고, 참 다양한 일을 하시네요.” 처음 만난 이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참 다양한 일을 한다는 말. 대체로 나는 하하, 그렇다고, 단 하나에 매섭게 몰두하는 편이라기보다는 이 일에서 저 일로 철새나 물고기처럼 이동하면서 나 스스로를 조금씩 변모시키는 쪽을 더 편안해한다고, 명징한 전문성이나 정
우리 반 아이들은 읽는다중학생인 우리 집 아들놈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고 아빠가 소설을 쓰는데도 아들은 책과 거리가 멀다. 책 좀 보라고 하면 아들은 해맑은 얼굴로 “나중에 보고 싶은 거 생기면 얘기할게” 하고는 그만이다. 가끔 뭘 읽었다고 해서 물어보면 일관되게 대충이다. 나였으면 며칠에 걸쳐 읽었을 두꺼운 소설을 두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