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호주 출신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가 2025년 4월 11일부터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따르면 주말에 하루 평균 6천 700여 명, 주중에는 4천 600여 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서울관 개관 이래 단일 전시로는 최대 관람객 기록을 세운 것이다. 어떤 점이 론 뮤익의 전시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을까?
하이퍼리얼리즘 조각가인 론 뮤익은 소규모 장난감 제조업을 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꼭두각시 인형과 다양한 생물 모형을 만들었다. 그 후 쇼윈도 디자이너로 일하다 TV프로그램 모형 제작 및 인형극 분야로 진출했다. 그런 그가 예술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6년 포르투갈 출신 화가 파울라 레고와의 협업으로 피노키오 조각상을 만들면서부터였다. 극사실주의 예술가이지만 론 뮤익이 실제 사람보다 현저하게 크거나 작은 조각을 만드는 이유는 그가 줄곧 인형을 제작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전시를 보면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 앨리스가 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떨어지거나 ‘나를 마셔요’라는 물약을 마셔 신체 크기가 변화하는 장면처럼, 론 뮤익의 전시는 현실의 감각을 비틀면서 우리의 신체가 변형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우리는 론 뮤익의 조각품 〈나뭇가지를 든 여인〉 〈치킨/맨〉 〈쇼핑하는 여인〉에 비해서 너무 크고 〈유령〉 〈침대에서〉보다는 너무 작은 사람이 되어 전시관을 헤맨다.
론 뮤익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전시를 안내하는 인쇄물이 비치되어 있다. 나는 그것이 론 뮤익이라는 마을 지도의 안내서 내지는 론 뮤익이라는 지역의 사건이 적힌 신문기사 같았다. 관람객은 전시 구역에 있는 론 뮤익의 조각품을 관람하면서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종이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의 조각품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사람들 같다. 아이를 외투 속에 넣고 머리만 내놓은 채 단추로 꼭 여며 고정시키고 양손 가득 물건이 담긴 비닐봉지를 쥐고 있는 여인(〈쇼핑하는 여인〉)과 청소년기가 지나면서 자신의 신체가 어색해진 듯 벽에 기댄 채로 서 있는 소녀(〈유령〉)가 있다. 한여름 서로 가까이 붙어서 속삭이는 연인(〈젊은 연인〉)도 있다. 또한 도시에서 흔한 풍경은 아니지만 테이블 위로 올라간 닭을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쳐다보는 할아버지(〈치킨/맨〉)가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생애주기와 감정을 지녔다.
<유령> , 1998/2014, 혼합 재료, 202 X 65 X 99cm, 야게오 재단 컬렉션. ⓒ강우근
<쇼핑하는 여인>, 2013, 혼합 재료, 113 X 46 X 30츠, 타데우스 로팍 컬렉션. ⓒ강우근
조각품이 마주하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을 바라보는 조각품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을지 추측하게 된다. 그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어떤 종류의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각품이 보여주는 일상 자체가 삶의 부조리함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조각품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관람객의 일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등 관람객 일상의 한 장면이 론 뮤익의 조각품처럼 전시된다면, 그 장면 역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모습으로 남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멈춰서 있을수록 한 사람을 둘러싼 삶이라는 무게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멈춤의 시간들
〈침대에서〉, 2005, 혼합 재료, 162 X 650 X 395cm,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강우근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뜬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침대에서〉)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지도 침대에서 빠져나오지도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조각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티타임을 갖는 모자장수와 닮았다. 시계가 오후 6시에 고정된 채로 3월의 토끼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자장수는 시간과 다투어서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앨리스에게 말한다. 그런 모자장수는 19세기 말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런던에서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당시 신사의 상징으로 불티나게 팔렸던 모자를 만들기 위해 기술자들은 수은 증기에 노출되어 우울과 불안 증상을 겪었다. 그렇게 ‘mad as a hatter(모자장수처럼 미친)’라는 관용어구가 생겨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자장수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사는 인물이라면, 론 뮤익의 전시에서 〈나뭇가지를 든 여인〉은 자신의 몸의 크기보다 더 큰 나뭇가지 다발을 든 채로 몸을 한껏 젖히고 있어야 한다.
〈나뭇가지를 든 여인〉, 2009, 혼합 재료, 170 X 183 X 120 cm,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강우근
나뭇가지의 날카로운 면은 몸을 찌르고 있지만 그는 멈추지 않은 채로 나뭇단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을 할 것처럼 보인다. 모자장수가 ‘모자 만들기’에 중독이 된 것처럼, 그는 ‘나뭇가지’를 모으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쇼핑하는 여인〉은 아이를 자신이 입은 코트로 감싸 안은 것도 모자라 물건이 한 가득 담겨 곧 터질 것 같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쥔 채로 앞을 공허하게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람을 자동화되게 만드는 노동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른 사람 되기
앨리스는 ‘나를 마셔요’라고 적힌 물을 마시면서 신체가 변화하고 다양한 시간 속에 갇힌 인물을 만나며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고 외친다. 그것은 다양한 생애주기와 직업을 가진 론 뮤익의 전시품들을 바라볼 때 촉발되는 감정과도 같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앨리스가 사건의 흐름 속에서 미끄러지고 변형되는 표면의 인물이라고 말한다. 론 뮤익의 전시를 보는 관람객 역시 크기와 외형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조각품들을 보면서 내가 아닌 다른 대상으로 변형되는 기분을 갖게 된다. 론 뮤익이라는 마을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그 마을에 있는 조각품이라는 주민을 한 명씩 마주하면서, 다른 성별이 되거나 나보다 어려지거나 늙어지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360도 회전하면서 조각품을 관찰하게 되고, 가까이 보지 않고서는 몰랐을 비밀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연인〉에서 앞면을 통해서는 남녀가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볼 수 있지만, 조각품의 뒷면을 통해서는 남자가 여자의 손을 뒤로 억지로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론 뮤익은 시종일관 묵묵히 조각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 작품의 주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관람객이 조각품을 통해서 타인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고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전시장 안에서 조각품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춘 관람객들 또한 우리가 이제 막 발견하기 시작한 타인이다.
〈Mass〉, 2016-2017, 유리섬유에 합성 폴리머 페인트, 가변크기,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멜버른. 펠턴 유중, 2018. ⓒ강우근
어느새 론 뮤익의 전시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각품을 관찰한 관람객은 해골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나도 크고, 수없이 쌓인 해골. 그건 예정된 것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미래다. 해골은 타자가 되는 연습을 해도 우리 안의 차이를 무관하게 만든다. 해골은 우리의 피부가 다 벗겨지고 남은 텅 비어 있는 미래다. 해골이 벽면 가득 쌓인 작품 〈Mass〉를 마주할수록 그동안 지나왔던 조각품들이 떠오른다. 역설적으로 론 뮤익의 전시를 통해서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연습은 전시장 바깥에서 가능성으로 아직 남아 있다. 크기가 변형되지는 않겠지만 론 뮤익의 전시를 보고 난 뒤 문득 돋보기로 보듯 우리의 관찰하는 힘으로 거리의 사람들이 확대되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전시장 바깥으로 이동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낼 것이다.
[스토리]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현대국립도서관을 짓는 경합에 참여하는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신입 건축가 사카니시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종합건설사무소에 취직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카니시는 무라이 사무소에 일하
1900년대 빈에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화가 지망생들 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3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가 열렸다. 1900년대 세기 전환기 속에서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등 ‘빈 분리파’를 중심으로 모더니즘 미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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