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기억이 자라나는 숲, 도서관 - 다비데 페라리오의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
이혜린_영화감독
2025-06-1917:02
영화는 흑백의 이미지로 고인이 된 움베르토 에코가 미로처럼 이어진 자신의 서가 안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쫓으며 시작한다. 처음에는 너무 방대한 양의 책이 꽂혀 있어 그곳이 개인 서가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약 5만 부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밀라노의 브라이덴세도서관과 볼로냐대학교 도서관에 일부 기증되었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다비데 페라리오 감독, 2024) 스틸컷
“La biblioteca è effettivamente simbolo e realtà di una memoria collettiva(도서관은 사실 한 집단의 기억을 상징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인터뷰는 영화의 핵심이자 출발점이다. 도서관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기억에 대한 은유라는 이야기인데, 영화 역시 한 인물에 대한 전기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 개인의 서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도서관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기억하기, 이야기하기, 거짓말하기, 이 세 가지 챕터를 중심으로 그가 생각했던 도서관과 책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하기’에서는 도서관이 인간의 경험과 사유를 저장하는 공동의 장소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기’에서는 《장미의 이름》과 같은 그의 소설 속 구성 원리와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체험의 가능성을, ‘거짓말하기’에서는 허위 정보와 음모론, 파시즘의 확산에 대한 에코의 날카로운 비판을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다비데 페라리오 감독, 2024) 스틸컷
CD-ROM이 생기고 사람들이 책의 위기를 걱정할 때 움베르토 에코는 기술 발전 속에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에게 책은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플로피 디스크나 CD를 이용해 파일을 읽거나 정보를 교환할 수 없지만, 여전히 책을 읽는다. 책은 전기가 필요 없고,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본질적인 기능을 잃지 않고 수세기를 지속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그 기술 안에 인류의 기억이 담겨 있고, 도서관이 그 기억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서가 안쪽에는 그가 휴대폰이나 노트북 없이 들어가 책을 읽거나 리코더를 불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공간이 있다. 책장에는 정말 이 책들을 읽었을까 싶은 주술, 요괴, 마술, 연금술, 오컬티즘(occultism) 등과 관련한 고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물론 기호학과 언어학에 관련한 책들도 있고, 키르허의 책들도 있다(그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를 좋아했다고 한다. 다양한 지식을 섭렵한 두 학자는 닮은 점이 많다). 그의 호기심과 탐구는 어디까지이며, 어디에 가닿았을까 궁금해지는 장면이었다. 그가 떠나고 고서만 남은 공간에서 자식들이 책을 꺼내보는데 그 앞에 장갑이 놓여 있다. 딸은 장갑을 보고는 “아버지는 절대 쓰지 않던 건데”라고 말하고, 아들은 “아버지는 책은 손으로 만져야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라고 답한다. 책을 손으로 만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단순한 애착이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다. 책은 단지 읽히는 텍스트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대상이었고, 그의 서가는 이러한 감각적 기억의 저장소이자 그가 세계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방식이 압축된 공간이었다. 영화는 그의 서가를 단순한 수집품의 집합이 아닌, 지적 탐험의 지도이자 그가 세상과 맺은 관계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다비데 페라리오 감독, 2024) 스틸컷
그는 또 읽지 않은 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가는 이미 완독한 책들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지적 호기심과 지속적인 배움을 자극하는 도구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과거의 기억과 정보를 보존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미래의 지적 연결고리로서 작용하는 장소인 셈이다. 읽지 않은 책들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식,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에 대한 가능성이며, 우리의 지적 삶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대부분인 나의 책장은 언젠가 탐구를 통해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과 검색창, AI 추천 알고리즘에 둘러싸여 있다. 원하는 정보를 몇 초 만에 찾을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책을 천천히 펼쳐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책의 가치를 되짚는다. 디지털 공간의 정보는 편리하지만 방대하다. 정보가 넘칠수록 오히려 지식은 단편화되기 쉽고, 그 흐름은 비선형적이고 단절되어 있어 체계적인 사유로 이어지기 어렵다. 반면, 책은 정보를 선형적으로 축적해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텍스트를 순차적으로 흡수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유 체계를 따라가는 훈련을 한다. 책은 생각의 인내를 요구하고, 그것은 곧 사유의 힘이 된다. 영화는 단편적이고 가벼운 정보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시간을 들여쌓는 감각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정보를 읽어내는 감각이 더욱 중요해진다.
영화에서 그는 ‘식물성 기억(memoria vegetable)’에 대해 언급한다. 기억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다른 기억과 연결되며 성장한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이 기억의 성장에 물을 주는 일과 같다. 문장을 따라 사유하고, 사유가 이어질수록 또 다른 생각이 피어난다. 그렇게 개인의 기억은 타인의 사유와 얽히며, 하나의 커다란 숲을 이룬다. 그 숲은 단지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상상과 질문, 연결과 반박이 촘촘히 얽힌 생명체에 가깝다. 에코의 서가가 그러했듯, 식물성 기억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단절되지 않고 자라나는 사유의 생태계다. 책은 나무에서 왔지만, 다시 나무처럼 가지를 치고 확장되어 새로운 지식의 나무가 되고, 다시 또 다른 독자의 기억 속에 심어진다. 이 순환이 이어질 때, 우리의 기억은 더는 개인의 것이 아닌 인류 전체가 함께 돌보는 살아 있는 풍경이 된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다비데 페라리오 감독, 2024) 스틸컷
구전에서 문자, 인쇄에서 디지털 매체로까지 이어지는 지식의 흐름을 탐구한 움베르토 에코의 서가를 기록하는 일은 감독에게 단순한 아카이빙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책이라는 매체를 사랑한 한 학자의 우주를 담아내는 일, 그 방대한 기억의 숲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쓴 시간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모든 고민의 대답처럼 느껴진다. 어린 손녀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에코의 서가를 누빈다. 책이 훼손될까 염려하거나 저지하는 사람 없이 그가 평생 구축해온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남긴 도서관은 완성된 기념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기억의 생태계이며, 다음 세대가 탐험할 새로운 세계이다.
이혜린_영화감독
다큐멘터리영화 〈서른〉과 〈위안〉을 연출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한 사람. 내가 만든 영화가 누군가에게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소년의 이름은 카밀로. 열한 살, 무언가를 훔칠 수 있는 나이다. 사는 곳은 메데인시 산토도밍고 사비오. 학교는 다니다 말았다. 도둑이 되려는 아이는 글자만 읽을 줄 알면 된다. 얼마 전부터 도둑질을 시작했다. 먹을 것도 훔치고 술도 훔
이번 '스토리' 코너에서는 에세이스트 김나리가 도서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발랄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해질 무렵 오거리에서 정장을 멋있게 입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도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모두 약속하지 않은 우연한 자리였다. 그는 어느 장소에서든 정갈하게 정장을 갖춰 입었다.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입고도 그다지 불편한 기색
[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열다섯 생일이 되는 날,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겠다는 다짐을 안고 가출을 결심한 카프카. 소년은 다카마쓰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카마쓰로 행선지를 정한 마땅한 이유랄 건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 걸 알고도 그 누구도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