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원 교수(이하 ‘이’): 안녕하세요? 이경원입니다.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약 30년 동안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쳤고, 작년에 정년퇴직했습니다. 제 연구와 강의 분야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초기 근대 영문학, 서구 근대성 비판, 세계희곡, 탈식민주의 비평과 이론 등입니다. 저의 일관된 연구 주제는 영문학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중심주의와 문화제국주의의 극복입니다. 요즘은 고대 그리스 인본주의 문화를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더: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교수님께는 어떤 감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 잘 아시다시피 노벨문학상은 처음 시상한 1901년부터 2024년까지 대부분 수상자가 서구 백인 남성 작가였고, 20세기에는 그런 편중 현상이 더욱 심했습니다. 121명의 역대 수상자 중 아프리카 흑인 작가는 두 명, 아시아 작가는 다섯 명뿐이었고, 한강 작가는 최초의 아시아 여성 수상 작가입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제도가 지닌 서구/백인/남성중심주의의 완고한 장벽을 한국의 여성 작가가 또다시 허물었다는 사실이 참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근자에 K-Pop을 비롯한 한국의 대중문화가 글로벌 시장에 활발히 진출해왔는데, 이제 문학에서도 세계문학의 ‘변방’이나 ‘별미’ 정도로 여겨지던 한국문학의 위상을 드높인 셈이죠. 게다가 그 작업을 국내에서도 여태껏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남성 원로 작가들이 아니라 젊은 여성 작가가 해냈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꾸준히 거론되어왔던 케냐 출신의 흑인 작가이자 아프리카 탈식민 문학의 대표인 응구기 와 티옹오의 《중심의 이동(Moving the Center)》이라는 평론집이 있습니다. 응구기의 핵심 논지는 문학적 가치의 기준을 단순히 서구에서 비서구로 자리바꿈하자는 게 아니라 서구 중심의 문화제국주의를 넘어 문화다원주의로 나아가자는 겁니다. 이는 ‘주변’이 새로운 ‘중심’이 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중심’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바뀐다는 점을 강조한 겁니다. 이러한 ‘중심의 이동’이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국문학 내부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한강 작가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더: 한강 작가 작품의 저항 정신과 기록문학적 가치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중요한 문학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 작품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 우리가 흔히 문학을 한다고 할 때 창작이든 비평이든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는 작업이잖아요. 이때 작가는 개인의 내면세계로 파고들거나, 반대로 개인을 둘러싼 사회 환경에 주목하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저는 한강 작가가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 내면의 갈등과 불안에 천착하는 것 같은데, 그 밑바닥에 실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개인의 문제가 개인적이지 않다는 거죠.
정신분석학에서는 의식의 밑바닥에 무의식이 있다고 하는데, 한강 소설은 그 무의식의 밑바닥에 야만의 역사가 있음을 고발하는 거죠. 이를테면 4.3 제주나 5.18 광주 같은 역사적 사건이, 누군가는 ‘난동 진압’ 정도로 여겼던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개인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잖아요. 한강의 소설은 그러한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애도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치유되지 않는 트라우마를 위무하는 거죠.
그리고 한강 작가의 저항 정신을 언급하셨는데, 저항 방식이 상당히 독특합니다. 흔히 저항이라고 하면 리얼리즘 문학에서 말하는 민족, 계급 갈등, 혁명, 투쟁 같은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한강 소설은 그런 ‘거대 서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에 평범한 개인의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딸에게 편식하지 말고 고기 먹으라고 강요하는 게 가부장적 폭력의 한 단면이라면, 그 딸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죠. 그리고 작가가 그러한 가부장제 사회의 틈새를 드러내고 지배 담론에 균열을 가하는 것 역시 저항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미시적’ 저항이 수반하는 효과는 절대로 미미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문학은 고정된 것이 아닌 이상 문학의 내용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향후 한국문학에서 담지했으면 하는 중요한 가치와 주제가 있다면요?
이: 앞서 인용한 응구기와 더불어 아프리카 탈식민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꼽히는 나이지리아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작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아프리카 기후가 절대로 부끄럽지 않고 종려나무도 시의 적합한 소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모욕과 자기비하로 점철된 오랜 세월의 콤플렉스를 떨쳐버리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추진해야 할 혁명이다.” 물론 아체베가 이 주장을 한 1970년대 나이지리아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현재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서구와 비서구의 문화적 불균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체베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유럽과 미국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길을 먼저 걸어갔고 우리는 그 길을 뒤따라가느라 급급했다는 인식은 이른바 ‘후발주자의 콤플렉스’로 굳어 있었죠. 그런데 한강 작가가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내용은 폭력이나 죽음 같은 보편적 문제인 동시에 유럽과 미국 사회가 갖지 못한 독특한 역사적 경험입니다. 이러한 우리만의 문화적 자산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게 필요합니다.
최근에 응구기가 ‘Globalectics’라는 제목의 평론집을 펴냈습니다. globalectics는 응구기가 만든 단어인데, 세계(global)와 지역(dialect) 사이의 변증법(dialectics)을 의미하는 합성어입니다. 21세기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에서 다극 체제로 재편되어가는 상황에서 문화적으로도 이에 걸맞은 실천을 하자는 겁니다. 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야말로 globalectics의 좋은 증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교수님께서는 한 인터뷰에서 AI 시대 ‘인문학 위기론이 있지만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결국 인문학적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의 근거는 무엇인지요.
이: 제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만 해도 AI의 힘을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ChatGPT와 구글의 Gemini를 살짝 맛보고 나니까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을 느낍니다. AI가 지식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것 같아서요. 밥 굶기 전에 정년퇴직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런데 AI 시대도 결국 콘텐츠가 경쟁력이 될 텐데, 그 콘텐츠의 출처가 이른바 문/사/철, 즉 인문학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더구나 AI가 어마어마한 데이터 처리 능력이 있다 해도, 데이터의 유용성과 정확성, 그리고 윤리적 가치까지 판별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여전히 그 역할을 주도해가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가르쳤던 교양영어 교재에 실렸던 내용이 기억나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증기선(steamboat)에 비유하면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배를 추동하는 엔진이라면 인문학은 방향타라고 했습니다. 상호보완적인 역할 분담을 강조한 거죠. 이 비유가 AI 시대에도 해당하지 않을까요?
더: 서양과 동양 사이(between)에서 연구를 해오셨습니다. 우리 문화와 문화 콘텐츠가 갖고 있는 문제점, 혹은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제가 영문학자로서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 연구해왔다고 하셨는데, 엄밀히 말하면 서구 지식을 수입해서 전파하는 중개상 역할을 해온 셈이죠. 여태껏 영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늘 저는 영문학이 ‘우리’ 문학이 아니라 ‘그들’의 문학이라는 불편한 자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영문과 교수로 지낸 30년이 저 자신과 제가 하는 일을 늘 의심하는 시간이었고, 때로는 국문학자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 문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외국 문화를 수용하되 그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용하고 전유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전유란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이용하는 거잖아요. 서구 문화와 우리 문화를 섞어서 재구성하고 ‘그들’의 형식에 ‘우리’의 정신을 담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서구/비서구 문화를 규정해온 ‘기원’과 ‘모방’ 혹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위계질서도 해체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는 이것을 ‘문화적 혼종성’으로 설명하는데, 한국 문화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더: 인터뷰에서 영미권 주요 대학의 ‘PPE’ 제도라든가 인문학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대안을 언급해주셨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시도해볼 만하다고 보시는지요.
이: PPE라고 하면, Philosophy, Politics, Economics의 약자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제적 교육, 즉 전공의 장벽을 넘어 통섭과 융합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인데, 영국과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고 상당수 국내 대학에서도 도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제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현재 한국 대학의 학부 교육과정은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예체능 등의 단과대로 구분되어 있고, 각 단과대 내부에 다시 학과 세부전공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개별 학과나 단과대의 영토주의적 욕심으로 졸업 이수학점을 너무 높게 책정해놓았기 때문에 다른 전공을 자유롭게 경험할 기회를 제한한다는 거죠. 이건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과와 교수를 위한 거죠. 그렇게 하는 이유로 전공 심화 교육을 내세우는데, 그건 대학원에서 하면 됩니다. 학부에서 좁고 깊은 교육보다 얕지만 폭넓은 교육을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사유의 지평을 넓혀줘야죠.
유럽과 미국 대학의 학부 교육을 보세요. 우리가 ‘교양 교육’이라고 하는 문리대(College of Liberal Arts and Sciences)가 핵심입니다.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을 학생들이 동시에 접하면서 지식의 편식을 하지 않도록 유도합니다. 이게 안 되면, 문과대 졸업생은 취업 현장에서 ‘문송합니다’만 되풀이하고, 공대와 경영대 졸업생은 ‘무엇’과 ‘왜’는 간과하고 ‘어떻게’만 파고들게 됩니다. 다가오는 AI 시대에는 이런 인재들은 경쟁력이 없을 겁니다.
더: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다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도 실질적으로 다문화 사회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인식 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일반인들이 왜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이: 복잡하고 무거운 질문인데,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88올림픽을 계기로 노동력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환했고, 이제는 인구통계로 봐도 명실상부한 다문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의 신화, 즉 ‘우리’라는 국가공동체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역사,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해묵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만약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가 없으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잖아요. 어떤 박애주의적 온정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인류애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경제적 필요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건 한국보다 다문화주의를 먼저 경험한 유럽이나 미국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한 가지 꼭 지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건강한 다문화 사회, 지속 가능한 다문화 국가를 건설하려면 ‘그들’보다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들’을 ‘우리’ 기준에 꿰맞추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먼저 바꿔나가야 합니다. 피부색이 더 어둡고 한국어가 좀 어눌해도 ‘우리’와 ‘그들’의 다름보다 같음을 보려고 하고, 차이를 차별의 구실로 삼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이것이 쉽지 않기에 그만큼 더 치열한 자기반성과 자기검열이 필요합니다. 대학교육에서도 이런 부분이 아직 부족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의 대학에는 다문화주의 프로그램이 부족합니다. 다문화 프로그램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운영해야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민족주의 신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더: 혹시 지금 집필을 준비하고 계신 저서나 연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은퇴한 후 생각 중인 책의 주제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입니다. 제가 왜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나 하면,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다 보니 그가 교습했던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인종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것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갑자기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이전에 역사적 전통이 있었을 텐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가 궁금했고 저는 그것이 서구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제가 고대 그리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영어나 한글 번역본을 통해서 텍스트를 접하고 있는데 최근에 느끼게 된 것이 있어요. 서구도 국내도, 고대 그리스의 문학, 역사, 철학은 서구의 정신적 문화적 뿌리이다 보니 함부로 얘기하기 힘든 듯해요. 분명히 호메로스부터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이 오리엔탈리즘이나 제국주의나 인종주의를 받아들이고 변주하면서 재생산한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요. 고전학계에서는 호메로스가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이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종주의의 정치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런 식의 과감한 비판과 평가가 인색하고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보고 싶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두렵습니다.
더: The Liverary는 도서관과 도서관 이용자를 주요 독자로 둔 매체입니다. 도서관에, 또는 사서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려요.
이: 실은 제가 인터뷰 준비하기 전에는 Liverary의 의미를 모르고 Library의 오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이게 Life와 Library의 합성어로, 일상 속의 도서관, 삶과 책의 불가분성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참 좋은 뜻을 지닌 단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헌법재판소 문형배 재판관이 많은 화제가 되었죠. 저는 그분의 삶의 궤적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이 최고 엘리트 계층인 법조인이면서 사회적 약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가난한 집안 환경과 김장하 선생의 도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독서 경험이 유달리 많았기 때문이더라고요.
특히 독서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법조문과 판례들만 붙잡고 있었다면 사랑, 배려, 연민, 관용, 상생 같은 가치를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며 실천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삶과 책을 연결하려는 The Liverary의 기획은 제도권 대학교육이 닿지 못하는 틈새와 여백을 파고듭니다. 바라건대, 한국의 공공도서관이 요즘 인기 있는 자기계발서나 취업준비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또한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랄까 성찰적 문제의식을 길러주는 서적과 프로그램을 일반 시민들에게 좀 더 많이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제2, 제3의 김장하와 문형배 같은 인물들을 더 많이 배출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지금 우리 사회,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이건 너무 큰 질문, 너무 버겁고 어려운 질문이네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를 굳이 하나만 꼽는다면 저는 관용, 포용, 용인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tolerance)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하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공학이나 제조업에서는 이 단어를 ‘공차’라고 하더군요. 어떤 부품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과정에서 허용되는 오차의 범위, 오차의 한계죠. 공차가 너무 크면 제품의 하자가 생기고 너무 적으면 제조 비용이 증가합니다. 공차를 적절히 설정해야 품질과 비용을 동시에 관리해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인간 삶에도, 모든 사회관계에도 이러한 적절한 오차의 허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원래 톨레랑스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나와 다른 입장, 내 신념과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요소를 얼마나 인정해주느냐의 문제였잖아요. 그런데 한국사회도 그렇고 지구촌 전체가 오차 허용의 한계를 점점 좁혀가는 느낌이 듭니다. 내 기준을 딱 정해놓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모조리 ‘종북좌빨’ 아니면 ‘수구꼴통’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든 집단이든 말과 생각과 행동이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틈도 없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할 여유도 없어집니다. 계속 혐오, 경멸, 역겨움의 감정만 확대 재생산하는 거죠.
저는 이러한 기현상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부추기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빚은 사회적 질병이라고 보는데,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그 질병의 치유책을 정치나 경제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문화의 영역에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문화라고 해서 뭔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이를테면 The Liverary가 하는 것처럼 도서관이 시민들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하고 삶과 책을 연결하는 기획도 아주 중요한 문화적 실천입니다. 이것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효과는 없어도 오래도록 사회 전반에 스며드는 삼투압이 될 겁니다.
* 이경원 교수의 저서 소개
《검은 역사 하얀 이론: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2011)
탈식민주의라는 사상 혹은 이론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기획이다. 흔히 말하는 탈식민주의를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 담론인 것처럼 많이 얘기해 왔다. 그렇게 되면 서구의 자기반성이나 자기성찰이 탈식민주의가 되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유구한 제3세계의 저항의 역사가 완전히 삭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3세계의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저항 담론을 먼저 소개하고, 서구 시장으로 들어와 서구화 제도화되면서 어떻게 변질되었는가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살펴본 저작이다.
《파농: 니그로, 탈식민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2015)
탈식민주의 이론가, 사상가 중 가장 유의미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프란츠 파농이다. 그는 안락의자 지식인이 아닌 자신이 주장한 이론을 반식민주의 투쟁 현장에서 실천한 지식인으로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사상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도 파농에게 빚진 바가 크다. 이 책은 제3세계 아프리카 중심의 저항운동, 반식민 담론을 자기 방식으로 전유하면서, 서구 이론을 이용해서 서구 독자가 아닌 제3세계 민중, 관객에게 전달한 텍스트이다.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 ‘이방인’이 본 ‘민족시인’의 근대성과 식민성》(2021)
그동안 연구한 탈식민주의 이론을 서구 정전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인 셰익스피어에 적용한 저작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권위와 신화적인 아우라로 인해 경건하게 다가가게 되는데, 그가 한 말이 존경과 찬탄을 받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실제로 제국주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문화제국주의라는 현실에서 그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을 도구로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해본 저작으로, 셰익스피어는 인류 공동의 문화적 자산인 동시에 영국이나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 독자들은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비서구 독자들에겐 이런 재해석 작업이 꼭 필요하다 생각해 쓴 저서이다.
이경원_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
미국 인디애나대 영어영문학 박사. 1997년부터 연세대 영문학과에서 셰익스피어, 세계희곡, 유럽 근대성, 탈식민주의 이론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표 저서로 《검은 역사 하얀 이론: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파농: 니그로, 탈식민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 ‘이방인’이 본 ‘민족시인’의 근대성과 식민성》 등이 있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첨예한 법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을 꼽아 달라.A 고전으로는 아나톨 프랑스의 《크랭크비유》, 흥미진진한 현대 작품으로는 프리드리히 뒤렌마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선한 영향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A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다. 꽤 오래 고민해봤지만 정확히 잘 모르겠다.(^^;) Q 지
예술고등학교 문창과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며 나아가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남산도서관이 2011년부터 운영해온 남산문학아카데미는 이런 학생들을 위해 문학교육의 충실한 장이 되고 있다. 남산문학아카데미를 통해 예비작가 지망생으로서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Q 학창시절 남산도서관 ‘남산문학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