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나를 망치고 있다. 대학에서 몇 학기를 보낸 후 내린 결론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이 무서웠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다니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 일을 하는 것도, 대학원에 가는 것도 나의 선택. 그러니까, 내 삶이 전부 나에게 달려 있다고……? 나는 그 아득한 자유를 감당하지 못했고, 내 선택은 방종과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정작 밥은 제대로 안 먹고 다녔고, 잠을 줄여가며 술을 마시고 기억을 잃기를 반복했다. 친구들의 연락을 무시하고, 아르바이트를 멋대로 관두고, 과제를 제출하지 않고, 교수님의 메일에 답장하지 않고, 가족의 걱정을 흘려듣는 날의 연속.
현실의 삶이 망가질수록 현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아무런 진로 계획도, 전공에 대한 열정이나 취업을 하겠다는 꿈도 없이 몸만 왔다 갔다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필기도 전혀 하지 않고, 시계만 보면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막상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과목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널널하면서도 재미있는 수업을 찾아다니던 나는 문학과 관련된 교양 수업을 여러 개 신청한 상태였다. 물론 그 학기에 제대로 마무리한 수업은 단 한 개도 없었고 결국 여러 개의 F 학점과 학사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잦은 결석을 하는 와중에 문학 수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허투루 읽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꾸역꾸역 전부 읽으려 애썼다. 그 당시 읽었던 작품들은 거의 외국 작가가 쓴 이야기들이었는데, 주로 유럽권의 소설이 많았다. 나의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인물의 모험담이 묘한 위로가 되었던 걸까? 그 소설들을 읽는 순간에는 생생해서 끔찍하던 현실이 조금은 흐려졌으니까. 아래에 소개할 세 권의 책은 특히 선명하게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다.
《오뒷세이아》는 영어영문학과의 ‘문학으로 읽는 서양문명’ 수업을 통해 읽게 된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이 책은 흔히 이야기하는 벽돌책으로 아주 아주 길다. 약 700쪽가량의 책을 네 번 정도 통독했는데, 수업에서 퀴즈를 보기 때문이었다. 어느 구절이 어느 부분에서 등장하는 것인지 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나는 기이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현실과는 관련 없는, 아주 먼 옛날 먼 곳의 이야기. 외눈박이 거인과 괴물과 잔인한 요정이 등장하는 항해와 귀환의 모험. 만화책의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리스로마신화를 붙들고 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나는 결국 이 이야기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퀴즈의 답을 적게 될 테지만, 밤마다 침대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오뒷세이아》를 읽는 동안만은 내가 이 작고 습한 자취방이 아닌 곳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테레즈 데케루》는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여성이 자신의 유폐된 내면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프랑스 소설이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195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인데, 나는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강독하는 교양수업 ‘프랑스 명작의 이해’를 수강하며 이 소설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파멸할 자유”를 선언하며 시작되는 장 투조의 서문과, 작품 서두에 인용된 “미친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보들레르의 시구에 나는 압도되었다. 소설의 서술을 통해 테레즈의 음침하면서도 애처롭고 고독으로 가득 찬 내면을 따라가면서 마치 나도 지적이고 우울하며 잔인한 숲의 상속자가 된 기분이었다. 커다란 숲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비합리적인 결정,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유로운 선택이 마치 나의 일상과 같다는 생각이 과도한 자기 연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나의 현실이 고독한 프랑스 여인의 내면인 것처럼 낭만화해볼 자유. 책 표지에는 모이즈 키슬링이 그린 한 여성의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우울한 여성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비현실에서 도래한 형이상의 질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2013)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이하 《안드로이드》)는 필립 K. 딕의 장편 SF소설로, 유명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다. 이 소설은 불어불문학과에서 개설된 교양 수업 ‘인간복제와 문학’을 들으며 읽게 되었다. 이 수업은 그 의문스러운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딱히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는 자유로운 수업이었다. 때마침 내가 수강한 학기에는 SF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여러 소설을 강독했고, 《안드로이드》 이외에도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과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등의 굵직굵직한 명작들을 함께 읽었다. 《안드로이드》의 배경은 먼 미래 최종세계대전 이후의 지구. 주인공 릭 데카드는 화성에서 도망쳐 온 안드로이드 노예들을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이 소설이 던지는 무거운 문제들,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윤리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은 나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한편,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이란 분명 삶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현실의 너저분한 형이하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빨래는 언제 하지?’, ‘오늘은 또 뭐를 먹지?’와 같은 자질구레한 고민을 덮어버리게 만들어줬으니까.
결국 위에서 언급한 세 과목 모두 기말고사를 보러 가지 않았다. 텅 빈 자취방에 누워서 지금쯤 시험이 끝났겠군, 하며 시간을 가늠해볼 뿐이었다. 그다음 학기에는 결국 휴학을 했고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되면서 자취를 계속 할 이유도 없어졌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얼렁뚱땅 졸업을 했으며 지금은 졸업한 지도 몇 년이 흘렀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동시대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와중에도, 그 시절에 읽었던 작품들이 종종 떠오른다.
리포트를 쓰지도, 시험을 보지도 않을 작정이었으면서 왜 그렇게 저 작품들에 몰두했을까. 왜 머나먼 세계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저 이야기들이 “지금-여기”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영웅의 모험과 복수, 19세기 프랑스 여인의 범죄와 고독, 먼 미래의 안드로이드 사냥꾼의 혼돈. 이것들은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인 나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때-거기”의 서사들이었다. 현실과 멀리 떨어진 외국 문학 속에 접속하여 현실을 망각하기.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위로가 되었다.
작은 자취방에 누워서 잡다한 책을 읽던 스물두 살의 나는 가까운 미래에 시인이 된다거나 책을 쓴다거나 문학을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학만이 위로가 되었던 순간을 거치는 동안, 어쩌면 나는 그런 이야기와 글을 쓰고 싶다고, 텍스트의 세계로 건너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무용해보였던 시간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어버린 지금을 예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뭐 이런 무리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분명 그때의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면서 위안을 얻고 고통을 망각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도망가려는 몸짓은 거대한 궤적 속에서 하나의 과정이 되어 나를 이곳-글쓰기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은 아직까지도 현실을 살아가는 와중에 잔상처럼 남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문학과 삶에 관해 생각하는 순간, 그것들이 나의 뼈저린 현실로 변모한 순간에 말이다.
유선혜_시인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2022년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추천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가 있으며, 현재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라는 정의를 다시 짚어보면······ ‘도서관은 빈민의 대학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지적 생명선이다.’ ‘도서관이 있는 지역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 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도서관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처럼 남아 있는 책 《도서관을 통한 지역사회 프로그램》은 도서관
그림책 속 부모는 왜 아이를 괴물 나라로 밀어내고, 겨울밤 숲 속에 떨굴까?서로의 성장을 위해서 아이를 놓아주는 부모의 모습!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법사람들이 책을 본다. 왜? 뭔가를 배우려고(‘느끼려고’나 ‘즐기려고’도 있지만,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배움에 포함될 수 있다. 어떤 느낌과 즐거움이 어떻게 올라오는가를 배우게 되니까). 사람들이 뭔
딴짓이 가능한 학교이자 딴 생각이 넘치는 놀이터,도서관에서 상상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을 만나다. 나는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간 적은 거의 없다. 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웬만한 공공도서관 지하엔 언제나 식당이 있었고, 돈가스를 5천 원, 가끔은 4천 원에도 먹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밥을 먹고, 주변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