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에서는 36년차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이자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하성은 승무원을 초대했다.
Q 언니가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 《여름의 맛》 등을 집필한 하성란 소설가라고. 가족 중에 문학가가 있으면 자연스레 책과 친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은데, 언니가 소설가라는 점이 독서 습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A 언니가 있기 전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유년 시절에 출판사에 근무하셨는데, 그래서 이직할 때마다 책을 홍보하는 인쇄물을 가지고 오셨다. 언니는 그 지라시의 문장을 보고 계속 문장을 이어 나가면서 글을 쓴 반면에, 나는 그걸로 창피하지만 딱지를 접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는 언니 옆에서 좀 끼적여보기도 했고.
언니가 20대 초반에 작가로 데뷔하기 위해서 《문학사상》 《현대문학》 같은 월간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했는데, 나도 그 월간지를 통해서 수많은 작가들과 시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나는 건 마광수 작가의 《권태》를 읽은 것. 《문학사상》에서 연재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문학이라는 게 이렇게 새로울 수도 있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언니가 소설가가 된 후에는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제일 먼저 나에게 작품을 보여줬다. 그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이제 와 보면 그게 정말 큰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시기에 비행을 많이 못 했을 때 언니의 작품을 위해 목포의 적산가옥에서 여러 날 머문 적도 있었는데, 그때 언니 곁에 있으면서 작품 세계관이나 통찰력 같은 게 알게 모르게 습득된 것 같기도 하다.
Q 승객들이 기내에서 보내는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 그중에서도 책에 몰입하는 분이 있는지,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경험이 있는지 궁금하다.
A 최근 인천에서 출발하는 뉴욕 행 밤 비행기에서의 일이다. 40대 중반의 남자 승객이 《데미안》을 읽고 계셨다. 《데미안》 하면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분이 기내에서 제공되는 꼬냑을 주문하고 그걸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면서 천천히 그 책을 읽고 계셨다. 책이 다르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순간 이코노미클래스라는 좁은 공간이 그 사람으로 인해 책에 집중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으로 보였다.
Q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독서’는 언뜻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업무를 하면서 책에서 얻은 감각이나 통찰이 도움이 된다고 느낀 적이 있나.
A 항공기가 생각대로 이륙하고 생각대로 착륙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항공기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승객들을 어떻게 탈출시킬 건지 항상 모의적으로 되뇌고, 되뇌고, 되뇐다. 그런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승객들은 보통 이착륙할 때 승무원들이 점프 시트에 그냥 앉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하다.
뉴스에도 많이 보도됐지만, 최근엔 승객들 중에 임의로 비상구를 열려고 하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예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아프신 분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돌발 행동도 굉장히 많다.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비행기가 번개를 맞아 엔진에서 굉음이 나면서 잠시 타는 냄새가 나기도 하는데, 그러면 손님들은 원인을 알 수 없으니까 무서워하는 거다. 또 최근에는 예전 같지 않고 지구가 많이 아프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난기류, ‘터뷸런스(turbulence)’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되었는데, 터뷸런스로 인한 기내 요동이 예전에는 몇 개월에 한 번 있었다면 요즘은 굉장히 잦다.
비행기에서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후각도 예민해야 하고, 청각도 예민해야 하고, 순간적인 판단력도 빨라야 한다. 무엇보다 돌발 상황에서 불편해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공감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경험으로 그런 것들이 길러지기도 하지만, 내 경우엔 독서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것들이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오만 가지 유형의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니까. 그렇게 접근해서 승객들을 이해하다 보면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거다. 진심은 통한다고, 내가 그분들의 불편을 진심으로 체감하면 손님들도 금방 아시는 것 같다.
Q 그렇게 책을 읽으며 다양한 삶을 접하는 일이, 누군가의 현실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혹시 그런 시선으로 더 깊이 다가가게 되었던, 마음에 오래 남은 승객과의 이야기가 있나.
A 사이판 비행 때였다. 80대 노부부 두 분이 탑승했는데 눈길이 갔다. 사이판 하면 보통 신혼부부들이나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고, 그래서 옷차림도 휴양지에 맞게 가볍고 경쾌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할머니는 겨울용 수면바지를 입고 타셨고, 할아버지는 파카를 입고 타셨다. 할머니는 휠체어를 이용하셨는데, 내가 할머니를 화장실에 모시고 가면서 그분들의 사연을 듣게 됐다.
할머니가 치매가 심해지면서 젊었을 때 잠깐 살았던 사이판에 가고 싶으셨나 보더라. 거기 연고도 없고 머무를 호텔도 안 잡았고, 심지어는 전세금 8천만 원을 빼서 비행기를 탄 거라고 했다. 어떻게 세관을 통과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나에게 사이판에서 살 집을 좀 구해달라고 했다. “자식들은 어디 계세요?” 물었더니 자식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그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지상직 운송 직원에게 그분들이 머물 숙소를 예약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그분들을 비행기에서 안전하게 내리게 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법적인 문제 때문에 그분들의 바람대로 사이판에서 여생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 같고, 그분들 서사의 결말을 알 수 없으니 더 마음이 막막해지고 또 마음에 오래 남는다.
Q 해외의 도서관 중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A 최근에 프라하의 수도원에 갔다. 사실 그 수도원은 도서관보다는 맥주와 음식이 맛있는, 양조장으로 유명한 ‘스트라호프’ 수도원이다. 그런데 가서 봤더니 맥주 맛보다도 도서관이 정말 아름다웠다. 고대 철학책이 2, 3층 정도의 서가에 3만 권쯤 꽂힌 모습이 장관이다. 책들을 보호해야 하니 가까이에서 보지는 못하고 방 밖에서만 관람을 하게 되어 있는데, 도서관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정말 아름다워서 그걸 보고 있느라 목이 아플 정도였다. 도서관인지 궁전인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운 도서관을 보면서, ‘이런 곳에 밤에 숨어들어서 혼자 독서하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Q 베테랑 승무원으로서, 또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책을 만나는 경로가 다양해졌으면 한다고.
A 승무원들은 한 달 스케줄에 따라서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호텔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원인 모를 외로움이 막 몰려온다고 해야 할까. 나 같은 경우에는 승무원이자 관리자인 사무장이다 보니 비행 중 나의 의사결정으로 인해서 만약에, 정말 만약에 비상 탈출을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승객들을 얼마만큼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느냐 하는 긴장감도 크다. 그렇게 업무에 관한 중압감까지 더해져 잠이 안 올 때 릴렉스하려고 오디오북을 많이 듣는다. 특히 오디오북을 고를 때는 서사가 해피엔딩인 걸 고른다. 예를 들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펄 벅의 《북경에서 온 편지》 같은 책으로 나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어제도 울란바토르에 갔다 왔는데, 관광하는 승객이 많은 비행이다 보니 술도 많이 드시고, 또 단체 여행객들은 흥이 오르다 보면 서로 시끄럽게 대화도 주고받는다. 그런 와중에 독서를 하기는 힘들다. 기내 환경도 아까 말한 터뷸런스 때문에 종이책을 안정적으로 읽기는 조금 어렵고. 요즘 현대인들이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것, 보는 것에 굉장히 익숙한 것 같고, 내 경우에도 읽는 종이책보다는 듣는 오디오북으로 많이 옮겨간 것 같다. 그래서 ‘오디오북이 많이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15년 전쯤 독일에 있는 서점에 갔을 때 ‘CD 하나 살까?’ 하고 딱 집었는데 그게 오디오북이어서 깜짝 놀랐던 일이 있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디오북에 관심을 갖고 많이 만드는 것 같아서 반갑다.
Q 기내에서 읽기 좋은 책을 세 권 정도 추천한다면?
A 보통의 손님들은 비행을 많이 지루해한다. 그래서 책에 입문하는 승객들이라면 흥미로운 추리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대부분 다 아실 것 같은데,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 문학적으로도 뛰어나고 철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다. 《바스커빌가의 개》라는 작품인데, 한번 시작하면 흥미진진해서 손에서 뗄 수가 없다. 또 이건 나만의 스타일인데, 나는 도착하는 국가에 따라서 읽을 책을 고른다. 그러면 머릿속에 있던 책 속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도착지가 뉴욕이라고 하면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프라하에 간다고 하면 무척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들, 일본에서 특히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 간다고 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추천하고 싶다.
Q 소설책의 마지막 장에는 흔히 ‘작가의 말’이 담긴다. 출간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그 마지막 페이지처럼, 언젠가 맞이하게 될 '승무원으로서의 마지막 비행'을 상상해본다면?
A 그날도 나는 변함없이 시간에 맞춰서 출근할 거고, 동료들하고 인사할 거고, 승객들이 탑승 전후로 불편하지 않은지 기내를 점검할 거고, 또 첫 비행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서 승객들 한 분 한 분을 모실 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40년이라는 비행시간이 엄청나게 길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입사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기도 하다. 어느 땐 정말 찰나같이 느껴질 때도 있고. 승무원으로 비행기에서 보낸 날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타고난 체력으로 원할 때까지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쉬움보다는 정말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 비행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첫 비행은 국내선이었는데 그때는 김포로 도착할 때였다. 어머니가 김포공항으로 나를 마중 나오셨다. 언젠가 오게 될 내 마지막 비행 날에도 그날처럼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주셨으면 좋겠다.
하성은이 추천하는, 도착하는 국가에 따라 읽기 좋은 책 세 권
《바스커빌가의 개》(아서 코난 도일)
비행이 지루한 승객에게 추천한다. 책에 입문하는 사람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로, 문학적으로도 뛰어나고 철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달의 궁전》(폴 오스터)
뉴욕행 비행기에 타는 승객이라면 미국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폴 오스터의 작품을 추천한다. 비행 시간이 기니 장편소설을 추천했다. 도착하면 머릿속에 있던 책 속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 그중에서도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 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오래 전 가족들과 함께 쌀로 유명한 일본의 어느 고장에 가게 되었는데, 책 속의 아름다움이 현실이라는 터널을 통과해 이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성은_대한항공 승무원, 사무장
36년차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이자 사무장으로 일하며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객실승무원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2006년에 창립모범표창을, 2016년에 공헌표창을 받았다. 언니인 하성란 소설가의 영향으로 학창시절부터 문학 계간지를 읽고, 다양한 고전문학을 접했으며, 책에서 얻은 감각과 통찰의 힘으로 매번 마주하는 낯선 승객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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