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생애 처음 한국 밖으로 여행 갔을 때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뉴욕의 2월. 여행 중이라 겨울옷이 변변치 않았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이 쌓인 인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버스의 앞문이 열렸다. 날이 많이 추워 버스에 얼른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버스 기사님이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문 앞에서 몇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몇 초가 지나던 순간 “띠 띠 띠” 하는 경고음이 울리면서 버스 앞쪽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버스 입구의 높이가 인도 턱 높이에 맞춰졌고, 버스 안에서 버스와 인도를 연결시켜주는 네모난 판이 자동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얼마 후 전동 휠체어 한 대가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그전까지 휠체어 탄 사람을 병원 밖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이 장면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은 ‘장애’와 ‘장애인’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내 의식과 생활 속에 들어온 순간이기도 했다.
장애인 차별법이 존재했던 때 시각장애인 부서를 개설한 공공도서관
‘장애인(障碍人)’. 이것은 평소 우리가 사람을 구분 지을 때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에는 신체를 특정해서 사용된 다른 명칭들이 있었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 ‘외팔이’ 등과 같은 단어들인데, 이런 말들이 언젠가부터 ‘장애인’으로 통합되어 사용되어오고 있다. ‘장애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여전히 논의 대상이다. 그러나 ‘장애’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변화해온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장애’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는 장애가 단순히 ‘병’이나 ‘나약한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격리’나 ‘시혜’의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이 같은 사회적 현상은 미국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를 보여주는 한 예가 ‘Ugly Laws’일 것이다. 이 괴상한 이름의 법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으나, 1867년에 제정되어 1974년까지 존재한 이 법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그들의 겉모습에 따라 차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공공장소의 질서에 해가 되거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이동의 흐름을 방해하는 사람을 공공장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이 법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대략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거지나 질병이 있는 사람 또는 이 법을 만든 사람들이나 이 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행색이 누추한 빈곤층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법의 저촉 대상에 눈에 띄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Ugly Laws와 같은 차별법이 존재했던 미국의 19세기 중후반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나오는 것조차 제한받는 암울한 때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처음으로 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1868년 보스턴공공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은 도서관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조지 틱너(George Ticknor)로부터 점자도서 여덟 권을 기증받아 시각장애인 부서를 개설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69년 보스턴공공도서관 연간보고서에는 점자책이 두 권이 늘어나 총 열 권이 되었으며, 네 명의 도서관 이용자가 총 18회 점자책을 이용했고, 점자책 이용자들은 1835년에 출판된 《Ladner’s Outlines of Universal History》*의 점자책을 도서관이 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8년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 부서를 개설한 후 10여 년 동안 시카고, 필라델피아, 뉴욕, 디트로이트 등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도 시작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1897년, 미국 의회도서관은 500여 점의 점자책과 악보들을 가지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열람실을 열었다. 이는 미국 정부가 1931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관 서비스를 법제화한 것보다 30년이나 더 앞선 것이었고, 이 시각장애인 열람실은 오늘날 미국에 존재하는 장애인을 위한 국가도서관서비스(National Library Service)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미국도서관협회(American Library Association)는 도서관은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동등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도서관의 장애인 서비스에 대한 기준을 1961년에 만들었는데, 이 또한 미국에서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이 제정된 1990년보다 3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렇듯 도서관은 법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다 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를 개설하고 관련 지침을 선제적으로 만드는 등 항상 능동적으로 움직여왔다.
1990년 제정된 미국의 장애인법(ADA)은 도서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법은 차별방지법으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장애인 보호법이다. 이 법이 제정되면서 도서관 서비스는 단순한 ‘호의’나 ‘시혜’가 아닌 공공기관의 ‘의무’이자 장애인의 ‘권리’에 속하는 영역으로 바뀌었다. 국가와 사회가 오랜 시간 장애인을 바라봤던 부정적인 시선과 인식이 비로소 바뀌는 시점이었다. 장애인법은 건물의 계단 출입구 또는 수동문 등의 물리적 장벽의 제거뿐 아니라, 모든 공공 서비스가 장애인에게 동등하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인터넷과 전자책 등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는 단순히 도서관의 물리적 출입 장벽을 낮추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보 접근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노숙자와 장애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회적 약자 포용의 도서관
장애인들이 미국사회와 맞서 투쟁해온 역사를 짧은 글 하나에 다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도서관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해온 서사를 역사적 사실 몇 개와 몇 줄의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이 장애인과 함께해온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있다. 미국의 여러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공공기관 중 하나가 도서관이었고, 오늘날에도 도서관은 여전히 미국사회에서 장애인에게 가장 포용적인 기관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공공도서관이나 주립대학 도서관에 가보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들을 볼 수 있다. 노숙자들이 책상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어도 누구 하나 도서관에서 나가줄 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또는 이동 보조기구를 타고 도서관의 경사로 입구로 들어와 책을 열람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미국에서 도서관을 들어설 때 볼 수 있는 자동문과 경사로는 단순히 법이 발전해온 역사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도서관이 사회적 약자와 함께해온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며 더 나아가 “You Belong Here Too 당신도 여기에 속합니다”라는, 도서관이 오랫동안 미국사회의 장애인들에게 외쳐왔던 메시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 책 《Ladner’s Outlines of Universal History》는 아일랜드 작가였던 토머스 키틀리(Thomas Keightley)가 저술한 것으로, 처음에는 같은 아일랜드 출신 과학자인 디오니시우스 라드너(Dionysius Lardner, 1793~1859)가 시작한 백과사전 출판 프로젝트 ‘The Cabinet Cyclopædia’의 일부분이었다. 이를 교육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용 일부를 편집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인쇄했다.
조상훈_UCLA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사서
UCLA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사서(Korean Studies Librarian, East Asian Library, UCLA)로 재직중이다. 한국학 자료를 큐레이팅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이민사에 관심을 가지고 대통령기록관과 대학 아카이브에서 자료를 발굴하고 이민사 관련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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