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임주빈의 플레이 리스트 - 가을의 햇살 같은 음악, 세실 샤미나드 ‘가을’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2025-10-3000:01
마침내 완전한 가을이다. 기후 위기는 해가 갈수록 우리의 여름을 점점 더 견디기 힘들게 한다. 올여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이 가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금은 여름의 끝자락도 아니요, 겨울의 초입도 아닌 가을의 한복판이다. 비로소 안도하며 감사한 마음이 든다. 불같이 뜨겁던 여름 햇빛은 어느새 가을의 필터를 끼우고 어루만지듯 나뭇잎을 시나브로 물들였다.
가을은 책을 읽기에도 좋은 계절이고 밖으로 나가 산으로 들로 다니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에 음악을 듣는 것이 빠질 수는 없지. 가을을 노래하는 음악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10월 가을 노래’ 정도는 금방 떠올릴 수 있고,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나 클라리넷 오중주 또한 가을에 지나칠 수 없는 음악이리라. 하지만 내게 ‘가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은, 명곡이라고 하기엔 멋쩍은 곡 세실 샤미나드의 ‘가을(L’automne)‘이다.
세실 루이즈 스테파니 샤미나드(Cécile Louise Stéphanie Chaminade, 1857~1944, 프랑스)는 인상주의 음악과 미술이 한창이던 시기 프랑스에서 작곡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여성이다. 동시대 작곡가인 드뷔시, 라벨에 비하면 명성에 있어 뒤지지만, 1913년 여성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했고, 오페라 〈미뇽〉의 작곡가 토마(Ambroise Thomas, 1811~1896, 프랑스)로부터 “이 사람은 작곡을 하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인 작곡가다”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인정받는 작곡가였다.
샤미나드는 낭만주의가 서서히 스러지고 인상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가 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며 전통에 뿌리를 둔 음악을 작곡했다. 새 시대에 혁신적 음악을 이끈 작곡가는 아니었기에 음악사적으로 조명받는 처지는 아니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두루 배우고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공연과 레코딩을 많이 하던 인기 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인기도 그때뿐, 샤미나드의 작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연주되는 곡은 1902년 파리음악원 콩쿠르를 위해 작곡한 〈플루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 D장조〉 op.107, 그리고 〈6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op.35 중에서 두 번째 곡 ‘가을’ 정도에 불과하다. 왜 이렇게 적은 곡만이 살아남았을까 생각해보니, 대다수 그의 작품이 살롱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피아노 독주곡인 샤미나드의 ‘가을’은 연습곡(Étude)이라는 제목에서 예상하듯, 동일한 리듬과 선율이 반복되는 낭만적 소품으로, 사실 이 곡에서 가을의 어떤 정취를 특별히 느끼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는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왜 항상 이 곡부터 떠올리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마법 같은 편곡 때문이다. 이 곡을 원곡이 아닌 이지 리스닝의 경음악 편곡으로 연주한 것을 듣게 된 다음부터다. 그 연주가 바로 가을을 물씬 느끼게 해준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여니 느닷없이 바람과 햇빛이 다르게 다가오며 ‘아, 가을이구나!’ 할 때의 그 느낌이라고 할까?
그 마법의 연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만토바니 오케스트라(Mantovani orchestra)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만토바니(Annunzio Paolo Mantovani, 1905 이탈리아~1980 영국)는 일곱 살 때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영국으로 이주했고, 런던에서 음악학교 졸업 후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이것이 만토바니 오케스트라의 시작이다.
만토바니 Mantovani
1970년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였던 세대라면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를 추억의 아이콘으로 기억할 것이다. 흔히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무드 음악(Mood Music)’이라고 부르던 장르의 대표적인 연주 단체다. 당시 이런 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로는 만토바니 오케스트라 외에 폴 모리아, 프랑크 푸르셀, 레이몽 르페브르, 프랭크 밀즈, 프랑크 책스필드, 까라벨리 오케스트라 등등이 있었는데 관악이나 피아노, 현악이 두드러진 저마다의 연주 특징이 있었다.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는 현악 파트에서 독보적인 사운드를 자랑했는데, 이를 ‘캐스케이딩 스트링(Cascading Strings)’이라고 불렀다. ‘만토바니 사운드’로 불리기도 하는 이 명칭은 만토바니 오케스트라의 핵심이자 독보적인 사운드 효과를 일컫는다.
캐스케이딩 스트링이란, 말 그대로 계단식 폭포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한 현악기 소리, 효과를 말한다. 캐스케이딩 스트링 효과는 영국 작곡가이자 편곡자인 로널드 빙(Ronald Binge, 1910~1979)이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를 위해 개발한 것으로, 12명에 불과한 영국의 만토바니 오케스트라가 미국의 대형 오케스트라에 필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던 음반사(Decca)의 요구에 부응한 연구의 결과였다. 성당에서 잔향이 길게 퍼져나가는 효과를 편곡(연주)과 녹음에 응용해 풍부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1951년에 개발, 이듬해 발매한 앨범부터 적용해 음악계를 놀라게 한 동시에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더니 이 경구(驚句)가 생활, 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예술에도 적용되는구나 싶어 흥미롭다. 이 편곡은 여러 현악 섹션이 같은 음표를 같은 음량으로 연주하되 동시에 연주하지 않고 아주 약간씩 지연되게 연주해서 메아리 효과가 나도록 한다. 미묘하게 시차를 두고 연주하면 소리가 겹치면서 풍성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캐스케이딩 스트링 효과다.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는 이렇듯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같은 현악 파트를 강화해서 풍부하고 부드러운 중저음을 만들어냈다.
또한 만토바니 오케스트라는 연주곡 리스트(레파투아)에 당시 유행하는 음악이라면 노래, 영화음악, 뮤지컬 넘버 등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선택했고 클래식 음악까지 수용,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편곡해 연주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샤미나드의 ‘가을’ 역시 이런 만토바니 오케스트라의 폭넓은 선곡으로 인해 대중화된 경우다. 이 곡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고 아름답고 친근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기에 만토바니의 레파투아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감미로운 선율과 풍부한 화성으로 감상자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만토바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샤미나드의 ‘가을’을 들으면, 현악기 소리들이 마치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빛 가을 햇살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만토바니의 캐스케이딩 스트링인가? 의식하며 듣게 된다. 이 가을, 음악이 주는 평화롭고 충만한 기운이 계곡의 폭포수처럼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길 바란다.
<음악>
샤미나드 Chaminade / Autumn 가을 (5:49)
연주: 만토바니 오케스트라(Mantovani Orchestra)
** 원곡
샤미나드 Chaminade / 연주회용 연습곡 Études de concert Op. 35 중 2곡 가을 L’Automne (5:35)
피아노: 스티븐 허프 Stephen Hough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얼마 전 큰아이가 디즈니플러스라는 OTT로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보기에 나도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예전에 재미있게 봤고 음악도 기억에 남는 만큼 지금 봐도 감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하지만 잠깐 보는 동안 진행이 어찌나 더디던지 지루하고 답답해서 계속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갖가지 ‘숏폼’ 콘텐츠와 스피디한 스
어떤 책은 읽고 있으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남과 비교해서 낫다는 말이 아니라,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때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잊고 지냈던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든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본다든가,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의
새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예는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하고 흥미롭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