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링(Wintering). 책의 영어 원제는 이렇다. ‘겨우살이’라든가 ‘겨울나기’ 쯤으로 번역하면 그만일 테지만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함의를 다시금 생각해보라는 뜻인 듯하다. 우리는 지금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서히 추위에서 벗어날 채비를 하려 한다. 이번 겨울은 어땠는가. 견딜 만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혹독했는가? 뜻밖에 훈훈하고 포근했는가? 어쨌든 우리는 그 겨울도 얼마 안 있어 떠날 것임을 알고 벌써 언뜻 코끝을 스치는 봄 내음에서 잊은 훈풍을 기억해내려 애를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겨울이 오기 전, 지난 해 늦가을 즈음에 들른 중고서점에서 눈길을 끈 책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였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이라는 짧은 설명이 붙은 이 책을 나는 마치 겨울 채비를 하듯 자연스럽게 꺼내 들었다. 북구의 겨울 숲처럼 보이는 흑백사진의 표지에 눈길이 끌린 듯도 하다. 눈이나 얼음 조각 하나 없는데도 ‘내가 곧 겨울이오’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 책의 작가인 캐서린 메이(Katherine May)는 영국 위트스터블(Whitstable)의 바닷가 마을에서 에세이스트이자 팟캐스터로 활동하는 여성이다. 10월부터 3월까지 일 년의 반 동안 일어나는 자신의 겨울나기를 기술하고 책으로 엮었다. 그는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힘겨운 시간을 겨울에 비유한다. 계절에 희망과 활기로 가득한 봄, 여름만 있을 수 없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겨울처럼 찬바람이 불어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거나 완전 침체기에 빠져 불안과 걱정 속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시간을 단지 힘들고 피해야 할 시간, 불평을 늘어놓고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게 아니라 인사를 건네고 받아들인 후 포용과 사랑으로 자신을 달래주는 일들을 하며 보내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그는 남편의 갑작스런 맹장염 수술로 일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데 이어, 자신은 대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인 가운데 아들은 학교 부적응으로 등교를 거부한다. 한 가지만으로도 힘든 시기에 그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거듭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시기를 보내는 것이 겨울을 견디어내는 시간과 같다고 생각하고 겨울을 잘 넘기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들을 주변에서 찾아내고 실행한다. 순환하는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겨울철 바다 수영 같은 과감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자신만의 스트레스와 우울증 치료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 용기를 주고자 자기만의 생각과 방법들을 이 책에 담은 것이다.
지금 실제 계절과 상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겨울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겨울나기’ 방법을 찾아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이 2020년 전 세계인을 팬데믹 위기로 몰아넣은 시기에 이 책을 영미권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놓은 이유이리라.
내 눈길을 끌었던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이 있었으니, 바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이었다. 책과 음악에 공통적으로 ‘겨울’이라는 제목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렸겠지만 사실 음악에 ‘겨울’이 들어가는 제목이 붙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잘 알려진 비발디의 〈사계〉에도 겨울이 있고, 그에 못지않게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곡으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차이콥스키 음악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가 겨울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의 작곡가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는 우리에겐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같은 발레 음악의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피아노협주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은 물론이고 교향곡 4번, 5번, 6번 〈비창〉 등 오늘날 전 세계 클래식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는 명곡들을 작곡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음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평생 슬픔과 우울을 떨쳐내지 못했던 음악가였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상의 슬픈 일이라도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이 되어 우울증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슬픔과 우울이 그의 독특한 음악 세계, 즉 우수에 가득 찬 감미로운 선율의 원천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스물다섯이 되던 186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졸업하고 이듬해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어 작곡과 교육 활동을 병행하게 된다.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업무가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본격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니 교향곡 같은 대작을 작곡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1866년은 차이콥스키에게 ‘겨울의 시간’이었다. 전 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표한 졸업 작품이 혹평을 받았고, 첫 교향곡의 작곡은 고통스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심적 부담과 그에 비해 아직 부족한 작곡 실력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잦은 신경발작을 일으켰고, 담당 의사는 그가 정신착란을 겨우 비껴갈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작곡한 교향곡 1번은 처음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몇 번의 개작과 모스크바음악원 원장이자 차이콥스키의 조력자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비로소 그가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1번 교향곡 g단조 op.13에는 ‘겨울날의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특히 1악장과 2악장에 각각 ‘겨울 여행의 환상’, ‘황량한 땅, 안개의 땅’이라는 소제목이 있어 겨울의 이미지를 굳힌다. 이런 소제목들로 인해 곡 전체가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뜻밖에 1악장은 밝고 활기찬 리듬으로 시작해서 햇빛 속에 빛나는 찬 공기의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추울지언정 겨울 여행도 얼마나 즐겁고 환상적일 수 있는가 말이다. 모험을 떠나는 동화의 주인공이 된 착각마저 든다. 느리게 연주되는 2악장은 약음기를 낀 현악기가 차이콥스키의 장기라 할 러시아 민요풍의 멜랑콜리한 선율을 연주한다. 난로의 온기가 감도는 방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는 메마른 겨울 땅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3악장 스케르초는 경쾌하게 지나가는 악장이며, 마지막 4악장에 가서는 파곳이 비장한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바이올린이 이 선율을 슬프게 연주한다. 차이콥스키는 이 악장에서 카잔 학생운동에서 불렸던 민중가요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인지 다소의 긴장감과 선동적 느낌을 받게 된다.
[음악 감상]
차이콥스키(Tchaikovsky) /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Winter Daydreams)〉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세기 러시아의 작곡가와 21세기를 사는 영국의 작가가 겪은 ‘겨울’은 전혀 달랐겠지만, 둘 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닥친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고 다시 ‘봄’을 맞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겨울도 각자 찾아낸 나만의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내 인생에 거름이 되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하루가 다르게 해가 짧아지더니 어느새 겨울이 코앞이다. 2025년도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한 해를 되짚어보다가 그만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내 인생까지 돌아보게 됐다. 길 위에 떨어져 뒹구는 마른 잎들이 언제 윤기 나는 초록을 지녔었는지 흔적을 찾기 어렵듯, 지금 늘어지고 주름진 피부에서 한때 빛나던 내 젊음을 찾아볼 수 없다.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 일본)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내겐 뭐니 뭐니 해도 ‘재미’라는 점이다. 딱 적당한 내러티브로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우리 곁에서 방금 일어났거나 어린 시절에 경험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일단 독자를 끌어들인 후 그 평범한 배경에서 범상치 않은 이야깃거리를 은밀하게 펼쳐내어 결국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