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업은 회사원이고, 작가는 부업이다. 그렇기에 조금 긴 호흡으로 책을 써나간다. 그러다 보니 집필을 기획할 때와 마감할 때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생긴다. 5년간 써 내려간 《주말엔 산사》의 경우 정보 전달 위주의 책을 기획했다. 그러나 에세이적 성격이 덧붙여진 건 그사이 인생에 변화가 생겼고, 그 부분이 표현됐기 때문이다. 한국 고건축에 대한 집필은 나에게 치유의 과정이었고,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쓴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나는 책을 쓰는 과정을 사랑에 빗대 표현해보려 한다.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아는 성향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얕게 아는 성향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깊게 알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 빠져 대상을 알게 되는 여느 사랑 이야기와 달리, 나는 주제에 대해 알아가며 사랑에 빠졌다.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어 시작한 사랑은 오히려 자신을 알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산사를 알아가는 일 또한 그러했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일은 나를 바라보는 일을 만들었다. 평온한 산사에 비해 나는 항상 바쁘고 쫓기듯 살고 있었고. 균형을 맞추려는 건축에 비해 나는 기준을 모르고 지냈다. 고건축이 주는 유연한 경험을 통제하려 했다. 3년을 계획했던 집필 작업은 힘을 빼는 연습을 하며 5년의 기간으로 마무리된다. 인터뷰집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공저, 마음산책. 2017)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좋은 작품을 만들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이 상호 영향을 주는 관계라고 정의하는데, 책을 쓰는 일도 나에게 그러했다. 주제를 깊게 탐구하는 일은 사랑을 배우는 일과 비슷했고, 고뇌하고 부끄럽고 치열했던 만큼 성장했다. 늘 예민하고 긴장 상태에 있던 나에게 산사의 유연함을 배우는 매 순간이 위로였다.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2000)은 다음과 같은 메모로 시작된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어쩌다 마주한 우연한 자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깨닫는 일이 촌스럽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쳐 가는 모든 순간에서 의미를 찾는 습관은 꽤 멋진 ‘능력’이라 생각한다. 쉽게 깨닫고 나아가며 때로는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한때는 이런 성향이 자아가 약한 것이라 여겼는데 이젠 유연한 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가치가 떨어지는 이 시대에 시가 필요하고 문학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뻔한 풍경이 누군가에겐 사진 한 장의 가치일 뿐이지만, 발견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영화 한 편이 될 수도 있다. 에세이는 촌스러운 글이라 여긴 때도 있었지만, 이번 책에서 건축의 시시각각을 보여주듯 생각의 시시각각을 보여주는 것도 한국의 고건축을 소개하는 세련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한국의 고건축은 다른 동양 건축과 다르게 개인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한다. 이 시기에 서양 건축을 공부했어도 나는 위로를 받았을까? 답은 그러하다. 위로의 방향은 달랐겠지만, 나는 치유의 순간을 겪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쌓는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나아감’이 ‘나아짐’이 되는 것을 경험했고, 이것이 나에게 위로였다.
모든 사랑이 성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되짚어보며 객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글쓰기라 생각한다.
추상적인 감상에 지나쳤던 고뇌를 글로 치환하며 정확한 단어를 찾게 된다. 정확한 단어로 생각을 정의하는 일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거리를 두게 만든다. 감정이라는 강물에 빠지지 않고 뭍에 올라가게 만드는 과정이 나에게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감정들이 글을 따라 나열되며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을 준다. 계속 쓰고 읽고 고쳐가며 물이 빠진 솜처럼 가벼워졌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뉜다. 교종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이라면, 선종은 깨달음에 뜻을 둔다. 그 방법의 하나로 질문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문답이 있는데 강신주 철학자의 책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참고했다. 절벽에서 손을 놓으라니? 제목을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선문답은 묻는다. 매달려 있는 곳이 ‘정말’ 절벽이 맞는가? 당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는, 절벽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실패하면 나의 자존감이 너무 무너질 것 같았기에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만큼 간절했고 불안했다. 당시 나에게 그 절벽은 공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건축을 찾아다니며 깨달은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평생을 그 자리에 머무는 건물이 아닌 사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되, 그래도 아니다 싶을 땐 나를 옮겨줘야 한다. 책을 쓰며 깨달은 이 간단한 이치는 괴로웠던 공간의 나를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데 힘을 주었다. 절벽인 줄 알았던 곳이 절벽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이 선문답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에 확증편향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믿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이다. 치유를 찾던 사람에게 치유의 단서가 보였을 뿐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단서를 채우게 되었고 조금 단단해짐을 느꼈다.
좋은 글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줬다. 내가 만났던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도 좋은 방향으로 닿았으면 좋겠다.
책을 쓰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나를 위한 일이었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산사에 대한 이야기
아름다운 것들로 내 주변을 채우고 싶었다. 공간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한 뒤에는 한동안 그 분위기가 내게 머무르는 듯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새롭게 변하는 건축은 내게 다양한 얼굴의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건축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2018년 《홋카이도_홋카이도 여행 안내서》를 출판하고 방문한 서점에서 내 눈길을 끈 건 같은 시기 새로 출판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였다. 일본에 관한 책을 쓰고 서양 문물을 좋아하던 내가 정작 나의 문화유산에 대해 잘 알았던가 반문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2019년 한일 관계가 급격히 나빠졌던 영향도 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방문한 순천 조계산 선암사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의 것에 대해 먼저 알아본 뒤 외부의 것을 탐색해보는 것도 좋은 기준과 시야를 가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런 접근은 건축을 넘어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으로 책의 말미를 장식하게 된다.
불교 신자가 아닌 나에게 산사는 방문하기 조금 어려운 공간이었고 굳이 시간을 내어 간 적이 없었다. 그 시간이 아까울 만큼 기대보다 좋았던 순간이 많았고, 불교의 유연함은 외부인인 나를 환대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어려워서 접근하지 못했던 독자에게 이 공간을 즐겁게 소개하고 싶어 책으로 만들었다.
산사는 한국 고건축을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였다. 궁궐, 한옥, 서원 등 다양한 고건축이 있지만 전쟁과 화재로 그 역사가 길지 않다. 산속에 있던 사찰은 스님들의 관리 아래 보존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깊고, 전국의 산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건축의 역사나 건축의 다양함 측면에서 한국 고건축을 깊이로, 너비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 동양 불교철학까지 더해져 건축을 공부하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산에 위치해 있기에 계절에 따라 자연을 만끽할 수 있고, 혼자 조용히 호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풍부한 경험의 공간을 소개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언젠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매력 있는 관광지로서 외국인에게 소개되길 기대한다.
이 책을 쓰며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통제적인 성격이다. 나는 매일매일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인데 하나라도 어긋날 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엇이든 정의하고 시뮬레이션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유연함의 미학을 알려준 건 부여의 무량사이다. 낮은 담장과 뚫린 담장은 주변의 많은 풍경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준비되지 않은 계획과 정의되지 않은 개념은 모두 불완전하다 생각했는데, 가능성이 담긴 유연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빼고 사니 예전만큼 100점 200점짜리 결과물을 내지는 못하지만, 다행히도 80점 정도는 되었고 이 점수에 만족하는 것만으로 삶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러한 깨달음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유연함으로 이어진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유연하여 다른 종교를 쉽게 흡수한다. 한국의 절에 가면 산신령을 모시는 산신각이 있고 일본에는 신사를 두기도 하며 중국은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을 둔다. 불교 축제에는 DJ나 록 음악이 등장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나 퀴어 퍼레이드를 축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편해지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유연함 때문에 관습에 지친 많은 젊은이가 불교 축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리라 추측한다. 삭막한 도심 속 물질적인 것들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철학적 메시지를 주는 산사라는 공간은 오늘날 필요한 가치일 것이다.
가장 좋아하여 오래 머무른 절은 선암사이다. 스님과의 차담을 갖는 시간이 있었는데 불교철학 ‘연기’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연기란 쉽게 말해 불씨가 있기에 불이 있다는 것이다. 절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 ‘대웅전’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스님만 드나들고 외부인은 양옆의 문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순사들이 선암사의 대웅전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었다. 스님은 간단하게 문에 낮은 턱을 두어 창문으로 만들었다. 한국 고건축에서 문은 창문과 외관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어 낮은 턱을 두는 것만으로 창문이 된다. 건물의 외관에 큰 차이는 없지만, 창문으로 다니는 꼴이 되어버리니 일본인은 그 문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은 이를 연기라 설명하셨다. 문제가 되면 없애면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는 동안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을 것이다. 영화 〈메기〉는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라는 메모 한 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는 왜, 어떻게 구덩이에 빠졌을까? 구덩이란 뭘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나와야 한다. 말은 쉽지만 정작 그 구덩이를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나의 경우 구덩이를 쉽게 나온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싸워 이겨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기라는 개념을 곱씹으며 멋진 포기, 멋진 빠져나옴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이해했다. 예전엔 비가 오면 빗속을 뚫고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비가 그치길 기다리거나 경로를 바꾸기도 한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에 매달리진 않는다.
건축을 좋아하고 찾아다닌 건, 언젠가 나에게 완벽한 집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사를 다니고 선문답을 통해 배운 건 내부의 것은 찾는 것이고 외부의 것은 좇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부의 것을 충분히 찾은 사람은 외부의 것을 좇지 않는다. 어떤 집을 지어야 하나 생각하기보다, 어떤 집에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 한다.
윤설희_디자이너, 작가
건축을 좋아하고 찾아다닌 건, 언젠가 나에게 완벽한 집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사를 다니고 선문답을 통해 배운 건 내부의 것은 찾는 것이고 외부의 것은 쫓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부의 것을 충분히 찾은 사람은 외부의 것을 좇지 않는다. 어떤 집을 지어야 하나 생각하기보다, 어떤 집에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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