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려오면, 겨우내 찬 기운으로 굳어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며 몸에도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벚꽃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아파트 15층 거실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공원길을 매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그 길이 벚꽃길이기 때문이다. 벚꽃이 활짝 피면 그곳은 꽃다발을 머리에 인 나무들로 꽃구름 길이 된다. 그 풍경이 펼쳐질 날을 기다리며 매일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벚꽃이 피면 그 길로 달려가 꽃나무 아래를 정처 없이 배회하며 소녀 시절로 돌아가 볼 것이다. 고개 들어 위를 보면 길 양쪽에 늘어선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만나서 만든 꽃 지붕을 보게 될 것이며, 그럼 나는 이 풍경에서 오페라 〈라크메(Lakmé)〉의 ‘꽃의 이중창’ 첫 가사를 떠올릴 것이다.
‘재스민으로 뒤덮인 둥근 지붕이 장미와 한데 휘감기네. 꽃이 만발한 강가, 상쾌한 아침이 우리와 함께하자 손짓하네…….’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레오 들리브(Léo Delibes, 1836~1891)는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프랑스 특유의 우아하고 화려한 발레 음악과 오페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대표 작품은 발레 음악 〈코펠리아〉와 〈실비아〉, 오페라 〈라크메〉다.
레오 들리브(Léo Delibes) (출처: Wikipedia)
오페라 〈라크메〉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19세기 인도가 배경이다. 인도 브라만교 고위 승려인 닐라칸타의 딸 라크메와 영국인 장교 제랄드의 첫눈에 반한 사랑과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적개심, 본국 귀환을 선택한 연인을 떠나보내며 이루지 못한 사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라크메의 비극을 다룬다. 3막 구성의 이 오페라는 1막에서 라크메와 시녀 말리카가 부르는 이중창 일명 ‘꽃의 이중창: 재스민으로 뒤덮인 둥근 지붕(Dôme épais le jasmin)’과 2막 라크메의 아리아 ‘종의 노래’가 유명하다. ‘꽃의 이중창’은 라크메 역의 소프라노와 말리카 역의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이중창으로, 1막에서 아침에 강가로 목욕하러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가며 부르는 노래다. 재스민꽃과 장미가 휘감아 만든 둥근 지붕과 새소리, 상쾌한 강물이 흐르는 평화로운 풍경이 두 성악가의 감미로운 화음으로 묘사된다.
오페라 〈라크메〉 ‘꽃의 이중창’ 장면 (출처: Opera Warhorses)
이 노래는 ‘뱃노래’이자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이중창’이라는 공통점으로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 프랑스)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뱃노래’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서적으로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프랑스)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Les Pêcheurs de Perles)〉에 나오는 테너와 바리톤의 이중창 ‘신성한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와 더 깊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두 곡 모두 유럽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동양’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라크메〉는 인도를, 그보다 20년 앞서 발표된 〈진주조개잡이〉는 실론섬(현 스리랑카)을 무대로 한다. 비제는 들리브보다 두 해 나중에 태어났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들리브보다 앞선 활동을 했고, 16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난 작곡가다. 비제라고 하면 누구나 오페라 〈카르멘〉을 떠올리지만, 〈진주조개잡이〉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작품 목록 중 하나다. 아름다운 테너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과 이중창 ‘신성한 사원에서’를 들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오페라 제목을 잊을 수 없다.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출처: Wikipedia)
〈진주조개잡이〉는 고대 실론섬에서 진주조개를 캐는 어부 마을의 족장 주르가와 친구 나디르가 레일라라는 무녀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겪는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갈등, 희생을 다룬 오페라다. 두 친구는 한때 한 여인을 두고 연정을 품어 사이가 벌어졌다가 다시 우정을 맹세했으나, 다시 나타난 그녀(무녀 레일라)와 나디르가 몰래 금지된 사랑을 이어가다 발각된다. 주르가는 친구의 배신과 무녀의 계율 위반에 분노하며 두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하지만 나디르만은 살려달라는 레일라의 간청을 듣다가 어린 시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그녀였음을 알게 되자, 주르가는 두 사람을 살려주기로 결심한다. 사형 집행일에 주르가는 마을에 불이 났다고 말해 사람들의 시선을 돌린 후 나디르와 레일라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결국 마을 사람들을 속인 죄로 희생되고 만다. 이중창 ‘신성한 사원에서’는 1막 초반, 오랜만에 재회한 주르가와 나디르가 과거를 회상하며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는 곡으로, 사원의 장엄함과 그 속에서 마주친 여인의 신비로운 모습이 숭고한 선율에 담겨 있다. “신성한 사원에 꽃과 금으로 장식된 그녀가 나타났네. 군중은 엎드려 절하고, 그녀는 베일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았지. 오, 성스러운 환상이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모습. 하지만 이제 그 유혹은 끝났네. 우리는 형제처럼 손을 잡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 우정을 지키리라!"
비제와 들리브가 활동하던 19세기 중후반 프랑스는 한창 ‘이국 취향(엑조티즘Exotism)’이 유행하던 시기다. 낯설고 신비로운 세계, 동양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이 유행이었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그렇듯 지루한 일상이 아닌 자극적이고 새로운 소재를 찾았고, 이국적 취향은 바로 그런 예술가들의 욕구에 최적인 소재였다. 이 풍조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양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편견은 대개 ‘신비롭고 관능적이며 야만적인 동시에 순수한 것’이었다. 이국 취향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영토를 확장하던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 역할을 했으며,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다섯 차례나 열린 만국박람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제의 경우 박람회 이전부터 흐르던 이국 풍조의 영향을 받았고, 들리브에 이르러서는 박람회를 통해 받은 영향이 절정에 달했다. 특히 1867년 일본 참가 이후 1878년, 1889년,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대한제국 등 동양 각국의 문화와 공예품들이 소개되어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浮世絵)’, 인도네시아 자바의 전통 음악 ‘가믈란(Gamelan)’이다. 비제가 실론섬을 배경으로 〈진주조개잡이〉를, 들리브가 인도를 배경으로 〈라크메〉를 쓴 것은 이런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두 작품은 인도 고대 종교 브라만교의 승려와 딸, 또는 무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종교적 규율이 엄격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금지된 사랑이 불러오는 비극을 다뤘다. 화려한 볼거리를 중시하던 당시 프랑스 오페라 경향으로 볼 때, 열대 식물이 가득한 이국적인 무대와 의상, 동양의 춤, 그리고 낯선 종교의식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서구적인 화성 체계 안에 독특한 선율과 관현악법을 사용한 음악은 프랑스적인 우아함에 은은하고 몽환적인 동양적 색채를 더해 주었다. 비제가 〈진주조개잡이〉로 19세기 엑조티즘을 오페라에 도입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들리브는 20년 뒤에 〈라크메〉로 이를 이어받았으며, 20세기 푸치니의 〈나비부인〉 〈투란도트〉까지 맥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음악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온도와 향기를 바꾼다. 들리브의 ‘꽃의 이중창’이 그렇다. 곡을 듣는 순간 완연한 봄이 펼쳐지면서 재스민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나는 인도의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가 되어 화려한 장신구를 몸에 두르고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을 끌며 꽃이 만발한 강가 정원을 거닌다. 이 풍경이 어디 프랑스인들만이 느낀 이국 정서겠는가. 부드럽고 우아한 선율이 불러오는 이 풍경은 동양에 사는 내게도 이국적일 수밖에 없다. 상상에 빠져본 것이 언제인가.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일에 급급하다 보면 꿈꿀 시간도, 상상력을 펼쳐볼 여유도 없다.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꽃의 이중창’을 듣는다면, 현실이 아닌 꿈 같은 세계로 들어간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벚꽃처럼 화사한 햇살이 내리쪼이는 나른한 봄날이라면, 그런 꿈을 꾸는 게 낯설지도 민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음악 감상]
1. 들리브(Delibes) / 오페라 〈라크메(Lakmé)〉 중 ‘꽃의 이중창(Dôme épais le jasmin)’
(원곡은 소프라노 & 메조소프라노의 이중창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두 소프라노가 각 파트를 맡아 노래함)
2. 비제(Bizet) / 오페라 〈진주조개잡이(Les Pêcheurs de Perles)〉 중 ‘신성한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
오페라 장면 일부 (3:11)
ten. 윌리엄 버든(William Burden) & bar. 네이선 건(Nathan Gunn)
이중창 전곡 (6:00)
ten. 마이크 스파이어스(Michael Spyres) & bar. 에드윈 크로슬리-머서(Edwin Crossley-Mercer)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 일본)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내겐 뭐니 뭐니 해도 ‘재미’라는 점이다. 딱 적당한 내러티브로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우리 곁에서 방금 일어났거나 어린 시절에 경험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일단 독자를 끌어들인 후 그 평범한 배경에서 범상치 않은 이야깃거리를 은밀하게 펼쳐내어 결국 끝까지,
1995년 늦가을, 나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었다. 계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바르샤바의 색채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랜 동안 소련의 영향 하에서 서구와 교류가 없던 공산권 국가의 수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함, 경직된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처음 디뎌보는 (구)공산권 땅이었기에 내가 경직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수건을 쓴 할
키 161센티미터에 48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진 남자.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카락에 우뚝 솟은 코, 부드럽지만 형형한 눈빛,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일자로 다문 얇은 입술에 늘 말쑥한 양복 차림. 표정에 품위가 드러나는 이 신사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조국이 전쟁에 휘말리자 입대를 자원하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냐 하면 바로 프랑스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