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하고 가벼워서 손에 들면 기분마저 좋아지는 책 《콘트라바스》는 내게는 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은 1985년 라디오 음악 PD로 사회의 첫발을 뗀 나의 멘토였으며 롤 모델인 동시에 스승이었고 선배였다. 38년의 방송국 생활에서 그분처럼 강직하고 성실했으며 열심인 분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어느 날, 클래식FM(당시는 1FM) 부장이셨던 그분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콘트라바스》를 전 부서원에게 돌리셨다. 악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책이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음악 PD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준비한 선물이었으리라. 과연 그럴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보다도 전 부서원에게 돌린 부서장의 선물이 ‘책’이었다는 점이 당시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 아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닐까 싶다.
1949년 독일에서 태어나 역사학을 공부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는 엽기적인 소재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와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씨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1984년 발표한 1인극 희곡 《콘트라바스》를 읽어보면 그가 음악 전공자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놀랍다. 이전에 콘트라바스는 ‘콘트라베이스’로 불리곤 했지만 ‘콘트라바스’라고 표기해야 보다 원어에 가까울 것이다. 첼로처럼 생겼지만 훨씬 큰 덩치로 현악기 가운데 가장 크고 낮은 음역을 담당하는 이 악기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콘트라밧소(contrabbasso)’에서 왔으며, 영어식 이름은 ‘더블 베이스(double bass)’다. 그러다 보니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혼용되어 ‘콘트라베이스’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이 책의 주인공은 35세의 독일 국립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바스 연주자다. 그는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음악가가 되었을 뿐, 음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 같진 않다. 무대 위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자기 몸보다 더 큰 악기를 다루느라 애를 쓰지만 관객은 콘트라바스 따위엔 눈길도 주지 않는, 존재감 거의 제로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오케스트라 내에서 주목받는 다른 악기에 비해 존재감 없는 콘트라바스 연주자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며 지내온 그는, 없는 자존심을 챙기듯 애써 음악에서 콘트라바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다가는 갑자기 돌변해 둔탁한 저 악기가 얼마나 골칫덩이인지 투덜댄다. 애증의 악기인 것이다. 그는 또한 최근 짝사랑하게 된 소프라노의 눈에 들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써볼 생각에 골몰하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음악가이다 보니 이 책에 거론되는 음악은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필두로 바흐,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바그너, 베르디, 차이코프스키, 슈만의 작품 등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이며, 콘트라바스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나 알 만한 디터스도르프, 슈페르거, 보테시니, 쿠세비츠키 같은 다소 생소한 음악가들도 등장한다. 어떤 곡의 어느 부분에서 콘트라바스의 활약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줄 만큼 쥐스킨트의 음악(콘트라바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읽는 내내 감탄할 정도로 깊고 넓다.
콘트라바스는 주인공이 언급하듯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봤을 때 대개 오케스트라의 오른편 뒤쪽에 위치하고, 관현악 작품 내에서도 독주 부분이 거의 없어서 관심은커녕 존재조차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교향곡 같은 관현악곡을 유심히 들어보면 저음부에서 붕붕 또는 둥둥 울리는 소리로 곡을 떠받쳐주는 콘트라바스 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음악의 템포를 잡고 유지시키는 악기가 바로 콘트라바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소리가 없다고 가정해보면 그 음악은 뼈대를 이루는 기둥 없이 지어진 건축물처럼 여겨지면서 뭔가 부족하고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콘트라바스는 음악을 지탱하고 감싸는 역할을 하는 악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요도에 비해 냉대를 받는 불공정함, 자기 몸보다도 큰 덩치의 악기를 다루느라 고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고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부당함이 주인공을 화나게도 하고 의기소침하게도 하는 것이다.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악기에 따른 서열이 인간 사회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고 얘기한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이 사회의 계급화, 서열화로 인한 불공정함, 부당함을 오케스트라의 악기에 빗대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일원으로 살아가는 소시민의 애환을 콘트라바스 연주자인 주인공에 투영하고 있다.
이제 돌이켜보니 오래전 이 책을 주신 선배님은 이 작품에 클래식 음악이 많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물하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자신의 모습은 물론이고 방송국에서 가장 고상하고 격조 높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방송국 내에서 가장 적은 예산을 배정받아 소수만이 듣는 존재감 약한 채널에서 일하는 동료 PD들이 마치 이 책의 주인공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이 책을 선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겨울, 두툼한 외투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는 콘트라바스의 음악을 찾아 듣는다. 다소 투박하고 둔한 소리로 뒤뚱뒤뚱 다가와 묵직하게 우리를 위로하는 콘트라바스 음악이 있어 올 겨울도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음악 감상]
1. 알비노니(T. Albinoni) / 아다지오 G단조
(콘트라바스: 게리 카Gary Karr, 오르간: 하몬 루이스Harmon Lewis)
미국의 연주자 게리 카(Gary Karr, 1941~ )는 콘트라바스도 독주 악기로 연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현 시대 최고의 콘트라바스 거장이다.
2. 슈베르트(F. Schubert) / 피아노 5중주곡 D. 667 〈송어〉 중 4악장 주제와 변주
(바이올린: 사이먼 블렌디스Simon Blendis, 비올라: 더글라스 패터슨Douglas Paterson, 첼로: 제인 샐몬Jane Salmon, 더블베이스: 피터 버코크Peter Buckoke, 피아노: 윌리엄 하워드William Howard)
피아노 5중주는 보통 바이올린 1&2, 비올라, 첼로, 피아노 편성인 경우가 많은데, 슈베르트의 이 5중주는 특이하게도 제2바이올린을 빼고 더블베이스(콘트라바스)를 포함시킨 특이한 경우다. 4악장의 주제는 잘 알려진 슈베르트의 가곡 〈송어〉의 멜로디다. 책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이 퇴장한 뒤 이 곡의 1악장이 흐르도록 쓰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있는 4악장을 듣기로 한다.
3. 디터스도르프(K. von Dittersdorf)콘트라바스 협주곡 E장조 중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콘트라바스: 외된 라츠Ödön Rácz, 오케스트라: 프란츠 리스트 실내 관현악단)
카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 1739~1799)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다. 바이올린을 비롯한 여러 악기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특이하게도 그는 당시로선 드물게 콘트라바스 협주곡을 두 곡 작곡했다. 콘트라바스를 위해 작곡된 협주곡이 별로 없는 가운데 그의 협주곡은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귀는 출처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마치 늘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익숙하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는 아마도 십대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거쳤을 것이다. 그 통과의례는 다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 일본)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내겐 뭐니 뭐니 해도 ‘재미’라는 점이다. 딱 적당한 내러티브로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우리 곁에서 방금 일어났거나 어린 시절에 경험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일단 독자를 끌어들인 후 그 평범한 배경에서 범상치 않은 이야깃거리를 은밀하게 펼쳐내어 결국 끝까지,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의 건강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데, 한 외국 여성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암을 최초로 발견하고 경고한 것은 바로 반려견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려견이 주인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고 계속 경고성 행동을 해서 병원에 가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암세포에서 발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