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중동 전쟁 이후 유가가 크게 오르고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종량제봉투 사재기 현상까지 일어났다.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서 의료용 소모품까지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이 부족해지자 우리는 이들이 모두 석유에서 추출한 화학물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건축 부문도 마찬가지여서 팬데믹 당시 벌어졌던 원자재 수급 불안과 가격 폭등이 또 한 번 재연됐다. 레미콘, 철근, 단열재, 방수재, 페인트, 아스콘 등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건축 자재가 석유 추출 화학물질이거나 중화학 공업이 생산하는 고탄소, 고에너지 물질이기 때문에 전쟁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했다. 건축 관련 뉴스에는 건설사 줄도산과 사업 중단, 그로 인한 법적 다툼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정부는 서민 생활 안정을 위해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나눠주는 한편, 원자재 수급을 위해 외교 자원을 총동원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과 노력에는 에너지와 원자재 수요 자체를 줄이기보다 기존의 공급 체계를 유지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 일반적으로 부유층이 서민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부유층의 피해를 국민 모두의 세금으로 보전해준다는 측면에서 공정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공공기관 차량 부제 운행이나 에너지 절약 캠페인 등 수요를 줄이기 위한 정책도 일부 시행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대규모 개발 사업과 경제 성장, 대량 소비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정부가 수요 제한을 강제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수요 제한은 경기 쇠퇴를 유발하기 때문에 경제성장률을 국정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 삼는 세태에서는 정부가 선택하기 힘든 방법이다. 하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와 전례 없는 국제 분쟁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성장 공식과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를 일깨워준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은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세계 기후학자들은 이제 1.5℃가 아니라 3℃에 대비해야 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인류가 배출하는 탄소량은 대공황이나 전쟁, 오일 쇼크 등을 제외하면 1850년 이후 꾸준히 늘어났지만, 탄소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크게 세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1850년부터 1900년 초반의 산업화 시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 사업과 산업화의 전 세계적 확산이 일어난 1945년부터 1970년 초반의 ‘거대한 가속’ 시기, 중국 중심의 세계 제조업과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글로벌 분업화, 자유무역, 규제 완화, 공급망 확대에 의한 국제 운송 등이 정점에 달한 2000년에서 2010년대 초반이다.
인류의 행위가 기후변화, 생물의 대멸종, 인공 물질의 퇴적 등 지구 지질과 생태 환경에 결정적 변화를 불러왔음을 강조하기 위해 ‘인류세’라는 용어도 등장했지만, 이 세 시기 모두의 공통점은 인류가 필요가 아니라 이윤을 위해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무한 추출해 생산량을 극대화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를 수단으로서 도구화했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경제 성장 덕분에 절대 빈곤이 완화하고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인류의 빛나는 역사적 진보 뒤엔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한 수많은 존재들의 희생이 있었다. 특히 폭발적인 압축 성장의 그늘 속에서 20년 이상 자살 사망률이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고, 동시에 국제사회로부터 ‘기후악당 국가’로 지목받는 우리에겐 더욱 뼈아픈 지점이다.
건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작동하는가?
건축은 삶의 장소를 만드는 일이기에 순수 예술과 달리 고도로 사회·문화적인 작업이고 정치, 경제, 산업, 기술 등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물론 건축가 개인의 정신이나 천재성이 중시된 예외적인 작품 건축도 있지만, 일반적인 건축 생산은 그 시대와 지역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집단적 의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건축이 사회 전반의 조건을 반영하여 만들어진다면 탄소 배출이 급증한 세 시기에 건축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고 작동했는지 돌아보는 게 의미 있을 것 같다.
먼저 1900년 전후 산업화 시기에 건축의 과업은 근대적 생활양식과 생산 방식에 적합한 새로운 공간 유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와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를 중심으로 기능주의, 국제주의 양식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표준화, 규격화, 효율화 등 생산성 향상과 도시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됐다. 가볍고 저렴하고 내구성이 우수한 산업 재료와 구조 방식이 등장해 투명하고 합리적인 건축 계획이 가능해졌고 용도지역제, 신도시, 광역교통망 등을 통해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도시계획이 제안됐다.
1970년대 국제주의 양식의 유리 마천루를 대표하는 시카고 시어스 타워 @wikipedia
두 번째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1970년대 오일 쇼크 전까지 이어진 전후 경제 붐 시기에는 부와 권력을 뽐내기 위해 콘크리트, 철, 유리 커튼월로 만들어진 거대한 마천루들이 세계 각지에 지어지면서 건축의 상업화가 극에 달했다. 당시에는 지구 자원이 무한하다고 믿었기에 냉난방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하는 유리 커튼월 건물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가 찬사받으며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간적인 삶이나 공동체의식, 환경에 대한 영향보다 개발과 수익이 중시되면서 미국의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나 네덜란드의 베일머메르(Bijlmermeer)처럼 획일적인 도시들은 결국 슬럼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비극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나 ‘8.10 성남민권운동(광주대단지사건)’ 같은 사회적 갈등이 번져나갔다.
슬럼화와 범죄 문제 등으로 철거된 프루이트-아이고 아파트 단지 @wikipedia
엄격한 기능 분리와 거대한 스케일로 계획된 베일머메르 신도시, 1971 @Open research amsterdam
마지막으로 2000년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된 시기에는 건물의 실물 가치보다 금융 상품이나 투자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건축의 금융화와 증권화’가 일어나 프로젝트 파이낸싱, 부동산투자신탁, 자산유동화증권 등 복잡한 금융 기법이 건축 생산의 핵심이 됐다. 자본 증식을 위한 대규모 도심복합개발과 재건축, 재개발, 공간 기획 등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한 곳에 터를 잡고 생활해온 주민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부동산값 폭등에 의한 세대 간 자산 격차 증가, 역사적 도시·건축 유산의 파괴, 도시 공간의 사유화와 커뮤니티의 위기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일어났고, 건축 매체의 성장과 함께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힌 글로벌 스타 건축가들이 브랜드화되어 대규모 개발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 국제현상공모를 진행하고 2014년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 @남상문
생명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건축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 기후위기 시대에 건축이 처한 근본적 딜레마는 단순히 탄소 배출로 인해 지구 온도가 상승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지구에 거주하는 다양한 존재들이 맺고 있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 중심, 시장 중심으로 세계를 구축해온 왜곡된 근대성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최근 10여 년 사이 세계 건축계에서는 지속가능성이 가장 큰 화두가 되었고, 올해 6월 국제건축가연맹(UIA)이 개최하는 ‘2026 바르셀로나 세계건축대회’의 주제 역시 ‘Becoming. Architectures for a planet in transition’(되기. 변화하는 행성을 위한 건축)으로 정해졌다. 행사의 소주제는 ‘인간 너머의 존재 되기’, ‘조화롭고 민감하게 되기’, ‘상호의존적 되기’, ‘초-의식적 되기’, ‘순환적 되기’ 등이다.
탄소 배출량(회색)과 대기중 탄소량(파란색) 추이 그래프 @NOAA Climate.gov
개발과 성장 시대에는 부동산을 합법적 범위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하며 경제적으로 최고 수익을 추구한다는 ‘최유효이용’이 지배적 가치였지만, 이제 건축은 고정된 사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의 관계와 순환 과정을 조율하는 생성적 과업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이러한 관계적·과정적 사고가 지구 생태계와 생명의 회복을 위해 배워야 하는 새로운 삶의 문법이다. 근대를 거치면서 잊히고 주변화됐지만, 태초부터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해왔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취약함이라는 생명의 고유한 성질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주변을 돌봐온 것이다. 애착, 사랑, 우정, 연민, 존경, 신뢰 등 인간이 공유하는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은 대부분 돌봄이라는 뿌리에서 생겨난다.
프랑스의 생태사상가 자끄 엘륄은 《비능력의 길을 택하라(Changer de revolution: L'inexorable de la technique)》(1983)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지 않는 자유를 ‘한계선’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인간은 가능성을 무한대로 열어젖힐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의 한계를 부여할 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있지만 고쳐서 재사용하고, 거대한 초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지만 작고 친밀한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 하이테크 기술을 이용해 모든 걸 자동화할 수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로우테크를 사용하는 것 등은 한계선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도 바이오필릭, 순환경제, 지역사회권, 회복탄력성, 커먼즈, 탈성장 등 최근 건축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담론은 모두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지배가 아니라 공생을 목적으로 한다.
《새를 초대하는 방법》 ⓒ현암사
나는 최근에 기후위기와 건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런 생각들을 모아 《새를 초대하는 방법》이라는 책을 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도시와 건물을 만들 때 우리가 더 평등하고, 생태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대안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과 바람을 담았다. 흔히 건축을 형태와 공간 미학, 기술공학으로 환원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건축을 뜻하는 영어 ‘Architecture’의 고대 그리스어 어원인 ‘arkhitekton’은 ‘관계를 조율하는 최고 기술’을 뜻했고 미학과 윤리, 공동체적 질서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건축은 본래의 통합적 성격을 잃고 세계를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공, 인간과 비인간, 지배와 피지배 등 이분법적으로 나눠 틀에 맞게 재단하는 수단이 됐다. 이런 차가운 기계문명의 흐름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우리 시대 건축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남상문_건축사, 날곳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날곳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로 활동하며 연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건축인문교양서 《지붕 없는 건축》, 《새를 초대하는 방법》을 썼다.
마음을 헤아리는 디자인 핀란드 헬싱키 도심 한편에 자리 잡은 백년 가게 ‘사보이 레스토랑’ 탁자에는 북유럽 호숫가의 유려한 곡선을 닮은 유리 꽃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알토 꽃병’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보이 꽃병이다. 사보이 레스토랑의 실내 디자인을 맡은 핀란드 근대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는 건축뿐만 아니라
일제의 '무도서관 정책'을 끝낸 3.1 운동과 인정도서관도서관 경제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도서관 역사를 대충 훑어보았다. 자료가 많지는 않았는데, 내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사실들이 많았다. 그냥 대충 알고 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에 도서관을 만들었고 그렇게 한국이 도서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뉴라이트 계열이 말하는 건,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 고통의 향유정연두의 백년 여행기에서 보이는 횡단의 상상력의 기저에는 디아스포라 고통이란 정동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전시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관련한 여러 사유의 거점들을 역동적으로 횡단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테오도르 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