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 도심 한편에 자리 잡은 백년 가게 ‘사보이 레스토랑’ 탁자에는 북유럽 호숫가의 유려한 곡선을 닮은 유리 꽃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알토 꽃병’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보이 꽃병이다. 사보이 레스토랑의 실내 디자인을 맡은 핀란드 근대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는 건축뿐만 아니라 가구, 조명, 문고리, 위생도기, 소품 등 다방면에서 북유럽 고유의 자연 친화적 디자인을 완성했는데 이 꽃병 역시 그의 작품이다. 부드러운 곡선미와 실용성을 겸비해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가구 브랜드 아르텍(Artek) 역시 알토와 그의 부인 아이노(Aino)가 함께 만든 회사다.
그는 서양건축사에서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손꼽히지만 당대에도 이른 나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스타 건축가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건축 일만으로도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그가 꽃병 같은 작은 소품 디자인까지 직접 챙겼던 이유는 단순히 디자인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결핵 환자들의 치료와 요양을 돕기 위해 설립한 파이미오 요양원(1933)을 설계할 당시 종일 누워 생활해야 하는 환자들의 눈이 피로하지 않도록 천장 마감재를 어두운 색으로 칠하고, 예민해진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시끄러운 물소리를 줄이고자 동그란 바구니 모양의 세면대를 직접 디자인했다. 결핵에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당시에는 일광욕이 병을 치유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자들이 편하게 앉아 일광욕을 할 수 있도록 파이미오 의자도 디자인했다. 이 건물에 설치된 거의 모든 가구와 소품, 실내 디자인이 알토의 작품이다.
그는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건물이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때 기능은 합리적 문제해결이나 생활의 편의, 시설의 목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심리적 문제까지 포용하는 보다 넓은 개념이었다. 기계적 성능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건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1940년 발표한 논문 〈건축의 인간화(The Humanizing of Architecture)〉에서 ‘기술적 기능주의’는 진정한 건축을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생각과 실천이 그를 건축이라는 전문 분야에 한정하지 않고 인간이 거주하는 환경을 총체적으로 디자인하는 예술가로 만들었다. 예술과 산업을 통합하려 했던 바우하우스, 수공예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던 미술공예운동, 유럽에서 유행했던 자포니즘 등의 영향도 있었지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존중을 건축 철학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핀란드 지폐에 초상이 새겨진 알토는 지금까지도 핀란드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국민 건축가다. 유럽에서 지폐에 새겨진 건축가는 여럿 있지만 그만큼 신망이 높았던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집집마다 놓여 있는 사보이 꽃병이 말해주듯 그는 핀란드의 문화적 자부심이자 인간애의 상징이다.
알바 알토(좌)와 파이미오 의자(우)
지역에 뿌리내린 따뜻한 모더니즘
20세기 초는 급속한 산업화와 국경을 초월한 시장 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기능성과 경제성을 강조한 국제주의 건축양식이 풍미하던 시절이다. 여의도, 강남, 테헤란로 등에 줄서 있는 업무용 고층 빌딩이나 우리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판상형 아파트도 국제주의 양식의 영향이다. 알바 알토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 등과 함께 근대 건축의 개척자로 언급되지만 국제주의 양식으로 대표되는 정통 모더니즘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독특한 인물이다.
20세기 초 유럽은 반역사와 진보를 모토로 하는 모더니즘 운동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스웨덴과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온 핀란드는 유럽 본토와 동떨어져 사회문화적으로 고립된 변방에 불과했고 건축 교육 역시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을 참조한 ‘북구 고전주의(Nordic Classicism)’, 위계와 질서를 중시한 프랑스 보자르식 교육이 주를 이뤘다. 태어나서 핀란드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알토 역시 건축 경력 초기에는 그가 존경했던 스웨덴 건축가 에릭 군나르 아스플룬드를 기점으로 하는 북구 고전주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지그프리드 기디온 등이 주축이 된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에 참여하며 모더니즘 운동에 눈을 뜨게 되고, 보편을 지향하는 모더니즘과 지역 고유의 특이성을 조화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건축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핀란드의 풍토와 전통적 구축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의 건축은 차갑고 기계적인 모더니즘에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후학들에게 영감을 제공했고, 모더니즘과 지역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1980년대에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알토는 1960년대에 세이나요키 시립도서관, 헬싱키 공대 도서관, 로바니에미 도서관 등 걸작이라 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 프로젝트를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의 건축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935년에 완공한 비푸리 도서관(Viipuri Library)을 알바 알토 건축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건물에는 사연이 많다. 1927년 설계 공모에서 당선할 당시에는 전형적인 북구 고전주의 양식 건물이었지만 건축위원회의 수정 의견을 수용하며 모더니즘 양식으로 변모했고, 이후 도서관 부지가 공원 중심에서 외곽으로 변경되어 건물을 전면 재설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완공 후에는 몇 년 사용하지도 못하고 1939년 발발한 겨울전쟁으로 비푸리 지역이 소련에 할양되어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2010년 핀란드, 러시아 정부의 노력으로 준공 당시 원형이 복원되기까지 비푸리 도서관은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과거 도서관은 성직자나 귀족 같은 특정 계층만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18세기까지도 일부 도서관들이 책을 책장에 쇠사슬로 묶어 보관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문자를 해독하고 정보를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19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공공도서관이 널리 보급됐지만 도서관의 기능은 폐가식으로 책을 열람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에 처음 개가식 도서관이 도입됐는데, 폐가식에서 개가식으로의 변화는 도서관의 역할과 성격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고 대여하는 시설이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며 지역 고유의 문화와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평생교육기관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소비력에 따라 공간이 차별적으로 배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과 무관하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도서관은 사회적 연대의식과 공공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토가 비푸리 도서관을 설계한 1920년대 도서관은 그렇지 않았다. 비푸리 도서관의 초기 현상설계 당선안과 전면 재설계한 최종안을 비교해보면 도서관에 대한 그의 생각이 크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동서남북 네 면이 공원에 접한 비푸리 도서관은 공원 지형의 완만한 높낮이를 이용해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도서관으로 진입하는 게 가능하다. 1층에는 어린이도서관, 강의실, 정기간행물실 등 사용이 빈번한 공용시설이 위치해 있는데, 이 공간들은 각각 공원으로 통하는 독립적인 출입구를 가진 동시에 공용 홀을 통해 실내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북구 고전주의 양식을 답습했던 초기 현상설계 당선안이 길고 장대한 계단을 올라가 로비에서 각 시설로 분기되었던 것에 비하면 사용자 접근성과 편의성이 크게 개선됐다. 각 시설의 용도와 기능, 공간적 특징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여러 개의 덩어리가 중첩되며 공원과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건물과 외부 공간은 지형을 따라 손가락 맞물리듯 배치되어 있다. 반면 요철 없이 직사각형의 단일 육면체였던 당선안은 공원에 홀로 놓인 조각상처럼 주변 환경과 대조적인 인상을 준다.
당선안과 최종안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당선안은 지하에서 지상 2층까지 층의 구분이 명확하지만 최종안은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듯 단차를 둔 여러 개의 바닥판들이 경사로와 계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층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토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보면 이러한 단면 구성이 북유럽의 숲속이나 구릉 같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언덕은 문학적 은유나 자연의 모방에 머무르지 않는다. 단차를 두고 상호 교차하는 입체적 공간은 여러 방향으로 시선을 유도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우연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용자는 숲속을 거닐듯 주변을 관찰하며 천천히 건물을 산책할 수 있다. 각각의 바닥판은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어 단차가 기능을 구분해주는 역할도 한다. 그는 사무실처럼 기능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나 계단실 같은 부대시설은 조밀하고 질서 있게 구성했지만 열람실 같은 공용 공간은 자유로운 조형으로 공간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공간 구성 방식은 계속 발전해 1960년대 설계된 도서관들은 공통적으로 펼쳐진 부채꼴 모양의 열람실과 층의 구분이 모호한 자유로운 단면 구성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굴뚝 스카이라이트를 통해 자연광이 퍼지도록 설계한 비푸리 도서관
알토는 모더니스트답게 사용자 편의성과 쾌적성을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기도 했다. 북유럽은 태양고도가 낮고 일사량이 부족해 실내에 자연채광을 적극적으로 유입하는 것이 중요한 설계 과제다. 하지만 도서관은 책의 보존을 위해 직사광을 피해야 하고 독서 시 눈부심과 음영도 고려해야 한다. 일정 조도의 간접광이 모든 시간대에 모든 공간으로 골고루 퍼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사각과 천장의 깊이를 계산해 1년 내내 직사광이 실내로 유입되지 않는 천창의 형태를 고안했다(당선안은 거대한 천창으로 빛이 지나치게 쏟아져 들어와 건축위원회에서 수정을 요구했다). 물결 형상의 1층 강의실 천장 역시 음환경을 고려해 소리가 모든 공간에 골고루 도달하도록 계획한 것이다. 알토의 건물은 기능을 적절히 해결하면서 수공예적 방식으로 높은 조형적 완성도를 성취하고 있다.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 재료, 나무, 벽돌, 타일 등을 활용해 친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특징이다.
알토가 설계한 건물들은 대부분 연식이 60년 이상 경과했지만 그가 설계한 공공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반세기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건물이 불편함 없이 생활에 밀착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불멸을 꿈꾸는 기념비는 시간의 무게에 속절없이 무너지지만 사랑과 애착의 공간은 세월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알토의 건물을 지속시키는 가치, 사랑과 애착의 근원은 사용자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공성이다. 배려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존중으로 이어진다. 알토의 건물은 양식이나 사조를 대표하는 문화재 혹은 대중의 이목을 끄는 랜드마크가 아니라 지역민의 마음을 품은 또 하나의 집이다.
전후 1950~60년대 서유럽에서 복지국가 건설이 한창이었을 당시 알토는 사용자 친화 설계와 지역성의 복원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던지며 예배당, 주민회관, 공공청사 등 수많은 공공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사용자를 배려한다는 개념이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건축 역사에서 ‘사용자(user)’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다. 거주자, 소유자, 고객 등의 단어는 건물을 점유하는 사람을 특정하지만 사용자라는 단어에는 건물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 즉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고려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도서관 프로젝트가 그의 건축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유다.
혹자는 그가 계층 간 격차와 사회 모순을 직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근대의 집단적 환상만을 고취시켰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실제로 서구에서 공공에 대한 수요가 위축됐던 1980~90년대에는 사용자라는 개념이 건축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하지만 극단적 양극화와 공동체의 해체가 사회를 위협하는 우리 시대에 공공성은 다시 논쟁적인 주제가 됐다. 시간을 뛰어넘어 영속하는 알바 알토의 건축은 공공성의 현대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남상문_건축사, 날곳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날곳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로 활동하며 연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건축인문교양서 《지붕 없는 건축》, 《새를 초대하는 방법》을 썼다.
화석연료에 의존한 우리의 불안한 일상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중동 전쟁 이후 유가가 크게 오르고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종량제봉투 사재기 현상까지 일어났다.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서 의료용 소모품까지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이 부족해지자 우리는 이들이 모두 석유에서 추출한 화학물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건축 부문도 마찬
The Liverary에서는 2022년 9월 창간호부터 다독가들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로,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되어 독자들의 호응이 큰 연재물이다. 이번에 The Liverary 에디터 팀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이 두 배 증가하는 대신 10억 원을 받을 수 있다면?“딱 1년 동안만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이 두 배로 늘어나요. 그 대신 본인은 10억 원을 받을 수있어요. 그러면 어떨 것 같아요?”처음 만난 분이 아이스브레이킹 삼아 던진 질문이었다. 분명 내가 기후위기 단체에서 일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이런 ‘밸런스 게임’을 꺼내든 이유가 의문이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