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빈의 플레이리스트] 더위를 식혀주던 음악 뒤에 담긴 민족혼–스메타나 〈나의 조국〉 ‘블타바(몰다우)’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2026-07-2310:00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가끔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처럼 지금의 여름을 보낼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특히 도시에 산다면 이제 에어컨 없는 여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의 어느 날, 더위와 싸우던 나는 마침내 나만의 피서법을 찾아냈다. 그날도 목덜미를 타고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을 견디며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찬물을 시원하게 뒤집어쓰고 나와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놓고 대나무 자리 위에 큰 대(大) 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얼음물 한 잔을 옆에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결정적인 한 가지를 보탰는데, 바로 턴테이블에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올려놓고 오디오 볼륨을 한껏 높이는 것이었다. 찬물과 대나무 자리의 냉기, 선풍기 바람이 피부의 온도를 낮춰준 것이라면, 몰다우의 도도한 강물이 굽이쳐 흐르듯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의 현악 선율은 귀를 타고 들어와 가슴속 온도를 낮춰주었다. 그 시원한 청량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피서법이었다.
이렇게 내 피서법에 이용되던 ‘몰다우’라는 음악. 그 곡이 누군가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며, 그 탄생에는 먹먹하고 묵직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19세기 유럽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이라는 개념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독일인은 강력한 독일 국가를, 이탈리아인은 통일 이탈리아를 꿈꿨으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 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독립운동을 펴나가던 시기였다. 이런 거대한 흐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보헤미아)에도 주체성에 대한 자각, 민족적 자존감을 찾으려는 체코 민족부흥운동(Czech National Revival)이 일어났다. 체코는 당시 관공서, 학교, 상류층에서 모두 독일어만 사용해야 했고, 역사와 문화 예술 분야도 완전히 오스트리아(독일계) 중심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체코의 지식인, 시인,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언어와 역사를 되찾고자 일으킨 운동이 체코 민족부흥운동이다. 체코어 사전 발간과 체코 문학 작품 출판 등 문화운동으로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언어로부터 시작했지만 이 문화운동이 대중의 호응을 크게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실로 음악의 공헌이 컸다. 음악은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이라도 듣는 것만으로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음악의 중심에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 체코)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코 민족부흥운동의 음악적 지도자,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출처: 위키백과)
스메타나는 1824년 맥주 양조 기술자(체코는 맥주로 유명하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하지만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것은 뒤늦은 나이 열 아홉살 때였다.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될 생각이었으나 차츰 작곡으로 영역을 넓혔다. 1848년 조국 체코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일어난 혁명이 실패하자 크게 좌절한 스메타나는 스웨덴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고 스웨덴으로 갔다. 예테보리 오케스트라에서 5년간 지휘자와 음악 교사, 작곡가로 활동하던 중, 고국의 민족부흥운동 소식을 듣고 “체코인에게는 체코인만의 음악이 필요하다”며 프라하로 돌아온다.
고국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체코어로 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당시 프라하 극장에서는 독일어나 이탈리아어 오페라만 상연되고 있었는데, 스메타나는 체코의 아름다운 농촌을 배경으로 폴카, 푸리안트 등 체코 고유의 민속 춤곡과 체코어 대사로 이루어진 오페라를 발표해 청중의 애국심을 일깨웠다. 밝고 명랑하며 재기 넘치는 스메타나의 걸작 오페라 〈팔려간 신부(Prodaná nevěsta)〉가 이런 오페라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체코인들에게 “우리 언어와 문화가 이렇게 아름답고 세련될 수 있구나”라는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주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스메타나는 50세가 되던 1874년,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걸작 〈나의 조국(Má Vlast)〉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5년여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은 스메타나 예술의 정점이자 체코 민족부흥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체코의 역사적 장소와 자연을 총 여섯 곡에 담아낸 연작 교향시로, 첫 곡 ‘비셰흐라트(Vyšehrad, 프라하의 옛 성)’를 시작으로 ‘블타바(Vltava, 체코를 흐르는 강)’―‘샤르카(Šárka, 체코 전설 속 여전사)’―‘보헤미아의 숲과 들판에서(체코의 자연)’―‘타보르(Tábor, 후스 전쟁의 영웅들)’―‘블라니크(Blaník, 민족 부활의 전설)’로 이어진다. 이 곡이 작곡되던 시기에 스메타나는 작곡가로서는 치명적인 청력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베토벤이 그랬듯 그 역시 외부의 소리는 듣지 못해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는 완벽하게 악보에 옮겨놓았던 것이다.
〈나의 조국〉 여섯 곡 가운데서는 단연 두 번째 곡 ‘블타바(Vltava)’(독일어 이름 ‘몰다우Moldau’로 더 잘 알려진)가 가장 유명하다. 블타바는 단순한 강이 아니라 체코의 젖줄이자 보헤미아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스메타나가 음악으로 묘사한 블타바강의 발원부터 바다에 이르는 여정은 마치 체코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작곡가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작품은 차가운 물줄기와 따뜻한 물줄기, 두 개의 작은 개울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본류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블타바강은 숲과 들판을 지나 농부의 결혼식이 열리는 곳, 밤의 달빛 아래 요정들이 원무(圓舞)를 추는 풍경 옆으로 흐르고, 강 옆 바위에는 자랑스러운 성(城)과 궁전, 유적들이 높이 솟아 있다.”
작곡가가 말한 블타바 두 줄기의 발원지는 각각 플루트가 차가운 개울을, 클라리넷이 따뜻한 개울을 표현한다. 대위법으로 정교하게 얽히는 두 선율은 서로 다른 삶과 생각이 만나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시작점이다. 이어서 현악기의 유려하고 애잔한 단조 선율(스웨덴 민요 ‘아, 아름다운 뵘란드여Ack, Värmeland du sköna’에서 차용)이 도도하게 흐르는 본류를 묘사한다. 조국의 영혼과도 같은 물줄기를 따라 사냥을 하고 결혼식을 하는 체코인들의 삶이 활기차게 펼쳐진다. 이어서 약음기를 낀 현악기와 플루트가 신비로운 울림으로 달빛과 요정들의 춤을 묘사하는데, 이는 고요한 강이 체코의 전설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평화로움도 잠시, 오케스트라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금관 악기와 타악기가 포효하듯 성난 물살을 토해낸다. 삶에서 마주하는 거친 풍파와 시련, 그리고 이를 돌파하려는 민족의 의지다. 마침내 피날레에 이르러 음악은 웅장한 장조로 전환되며 주제가 재현된다. 이는 넓은 바다로 향하는 블타바를 통해 모든 시련을 이겨낸 체코의 영광과 구원을 표현한 것이다.
체코 프라하에서는 매년 5월 12일에 국제적 음악 축제 ‘프라하의 봄’이 개최된다. 이날은 음악으로 체코인의 혼을 깨운 작곡가 스메타나의 서거일이다. 축제의 개막곡은 언제나 단 한 곡,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다. 이는 관례를 넘어 국가적 의식에 가깝다. 스메타나가 심어놓은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게 하는 체코인들의 방식이다.
학창 시절 여름방학에 더위를 잊게 해준 음악 ‘블타바’는 단순히 강을 묘사한 풍경 음악이 아니라 민족혼이 담긴 서슬 퍼런 강줄기였다. 그렇기에 그토록 시원했었나 보다. 우리에게도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있다. 그를 상기시키는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뜨거운 여름날, 독립의 열망을 담은 이 곡을 듣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 감상]
스메타나 / 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 중 2. ‘블타바(Vltava)’
지휘: 세묜 비치코프(Semyon Bychkov),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귀는 출처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마치 늘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익숙하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는 아마도 십대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거쳤을 것이다. 그 통과의례는 다름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자면 내게는 먼저 혼돈 그 자체다. 주요 인물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와 연관된 다른 인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의 관계를 헤아리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다음 진도가 나가지 않기 일쑤다. 그래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찾아 읽다 보니 늘 맥락의 부재로 헤매게 된다. 매번 제대로 기억 못 하고 헷갈리면서
새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문학과 음악, 음악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 예는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하고 흥미롭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