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지도(atlas)가 서로 닮았다는 걸 알아챈 한 사람이 있다. 아비 바비부르크(Aby Warburg)에 대한 이야기다. 바비부르크 문화학 도서관은 그의 프로젝트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와 함께 사고의 기계로서의 아카이빙을 이야기한다. 바비부르크 도서관의 책들은 십진분류의 주제별 숫자나 저자명 순으로 배치되지 않았다. 대신 ‘좋은 이웃의 법칙(Law of the Good Neighbor)’에 따라 책과 책 사이의 관계성이 스스로 사유를 생성하고 견인하는 배치가 도입되었다. 책들은 인접성에 따라 배치되며 사유의 지형도를 그려 보였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게서 이름을 빌려 온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는 바비부르크가 1924년부터 생애를 다할 때까지 지속한 시각적 아카이브 프로젝트다. 검은 천을 씌운 대형 판넬 63점에는 고대 조각과 르네상스 회화, 우주도, 지도부터 당대의 신문 광고와 우표 사진까지를 망라한 2천여 점의 이미지가 배열되어 있었다. 이 이미지들은 도서관 서가의 책들이 그러하듯 서로가 서로를 해석하며 지도를 그린다. 책이든 이미지든 개별적인 사물 자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들이 생성해내는 사유의 지형은 쉼 없이 변화할 것이다. 그러니 이 지도들은 미완성으로서 완성된다.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라면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도 빠트릴 수 없다.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무한의 메타포다. 도서관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우주의 수수께끼를 맞닥뜨린다. 무수한 육각형의 방들이 위아래와 환형으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문자열의 책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책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진리와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무의미한 철자의 나열과 거짓으로 가득하다. 정보의 과잉이 오히려 일상을 왜곡시키는 요즘, 이 도서관 메타포는 세상과 진리를 한층 아득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아비 바비부르크의 도서관과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서로 다르지만, 한편으로 도서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함께 증언하기도 한다. 도서관은 책이라는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관계성과 사유를 촉발하게 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혼자 미리 계획할 수 없는, 책이라는 사물의 우연한 행위에 휘말린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뽑아 드는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의 곁에 어느새 여러 권의 책들이 쌓였다. 어떤 것은 신간이겠지만 어떤 것은 그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전의 구간이다. 시절을 넘나드는 한 무더기의 책들이 오직 그날의 즉흥적인 기분으로 그의 곁에 모였다. 그 작은 책 탑의 배열로부터 특별한 그날 그 순간의 사유가 발생한다. 아비 바비부르크의 열망처럼, 보르헤스의 무한에 대한 꿈처럼. 그는 그 작은 탑에 눈길을 주었다가 문득 그 꿈과 교차할 것이다. 그것이 도서관이 이끌어내는 사물과 사람의 교차다.
1년 전의 도서관 개관전
아비 바비부르크의 도서관이나 보르헤스의 도서관과는 조금 다르지만, 내게도 그런 교차를 직접 궁리해보게 해준 특별한 도서관이 있다. 한 달 좀 못 되는 시간 동안 세상에 잠시 생겨났던 도서관에 대한 기억이다. 작년에 나는 ‘수건과 화환’이라는 텍스트 중심의 전시 플랫폼에서 열린 ‘타로 이티티 아아 모이에하 에파아 리하하 도서관 개관전’이라는 단체 전시에 참여했다. 김태희, 김선희, 김은정, 최예림, 최영건, 홍예지가 참여했으며, 김태희가 기획한 이 전시는 2025년 3월 22일부터 4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나는 그 전시에서 ‘덧조각 도서관’을 열고 〈REDEEMING LOVE〉 1, 2라는 작품들로 참여했다.
최영건, REDEEMING LOVE, 2025
각 작가가 자기만의 도서관을 열고 그곳의 책으로써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이었다. 작가들은 저마다 책에 대한 해석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내 작업의 경우도 그랬다. 나는 2024년 출간된 나의 소설책 《연인을 위한 퇴고》에서 찢어 분리해낸 낱장의 페이지들과, 당시 출간을 준비 중이던 에세이 《사랑으로 돌아가기》의 일부를 프린트하고, 두 책과 관련된 이미지 몇 장을 프린트해 그 모든 페이지들을 합쳤다. 가로 164센티미터, 세로 164센티미터의 사각형으로 내 몸의 키를 닮은 그 작품이 〈REDEEMING LOVE〉 1, 그 아래 배치된 책과 낱장의 콜라주 및 프린트물이 〈REDEEMING LOVE〉 2였다.
최영건, REDEEMING LOVE, 2025, 부분최영건, REDEEMING LOVE, 2025, 부분
전시에 온 사람들에게 나는 배치해 둔 책의 낱장들을 일부 나누어주었다. 그때 낱장을 찢어낸 책이 나의 책꽂이에 꽂혀 있다. 1년쯤 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작업에 대해 이런 큰 구조는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세부적인 것들은 꼼꼼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지리적 공간에서의 그 전시가 막을 내린 후 남겨진 건 무엇일까. 구글에 내 이름과 ‘수건과 화환’이라는 공간 이름을 치면 검색되는 자료들이 있다. 내 컴퓨터의 폴더에 저장된 전시 전경 이미지들도 있다. 나의 경력을 말할 때 내가 쓰게 되는 전시명이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시간이 흐르며 기억에는 내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엉뚱한 요철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퍼티’가 기억난다. 전시 공간에 못을 박고 빼며 ‘퍼티’라는 걸 그때 처음 써보았는데, 그게 새삼 신기했다. 전시의 시작과 끝에는 물리적인 노동이 있다. 모든 서가에, 종이책이 있는 온갖 장소에 노동이 있는 것처럼. 전시가 끝난 후 〈REDEEMING LOVE〉 1, 2는 내 트렁크에 담겨 작업실로 운반되었다. 그 후에는 박스에 담겼다. 그중 일부인, 표지에 거울 종이가 붙은 소설책은 따로 책꽂이에 꽂혔다.
여름날 이층집 계단을 내려갈 때면 이따금 그 붉은 표지의 소설책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굳이 눈길을 두지 않고 다른 일을 보러 빠르게 지나쳐 가곤 한다. 이것이 1년이 지나 이 전시가 내게 해 보이는 행위다. 이 방의 벽 너머 책꽂이에 함께 1년을 지나온 책이 있다. 인간의 감각과 언어로, 나는 내가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쓴다. 그 책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어 서점까지 유통된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나 말고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출판에게는 복제라는 동력이 있고, 시각예술은 원본성이라는 축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시각예술 작품의 일부분이자 출판물인 그 책에게서 두 성질이 고요히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1년 후의 만남
시간이 흘러 자기가 쓴 글, 자기가 펼쳤던 전시를 돌아볼 때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작년 전시를 마친 뒤, 나는 부러 시간이 지난 후 꼭 한 번 내게 있었던 일들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인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비유기적 사물들이 어떤 행위를 쌓아나가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인간인 내가 해온 행위들을 헤아리는 일은 비교적 어렵지 않다. 나는 그 전시 이후 ‘수건과 화환’이라는 전시 공간에 대해 글을 썼다. 문서를 전시할 때 일어나는 일들과, 그 일들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일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었다. 지금도 나는 문서(document)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으며, 문서 전시와 아카이빙이란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을 쓰는 중이다. 글을 쓰며 맴맴 여름을 난다.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떠올리며 말한다면, 아마도 지금 쓰는 나의 그 글은 작년에 썼던 ‘수건과 화환’에 대한 글 곁에 나란히 놓일 수 있을 테다. 여신의 이름에서 비롯된 지도를 그리려, 까만 천 위에 유기체-나가 쓴 비유기체-문서들이 별처럼 놓인다. 그 곁에는 (지금은 창고에 들어간) 〈REDEEMING LOVE〉 1, 2도 있어야 한다. 이 비유기체-사물들이 그동안 무엇을 해왔나. 그들은 나란히 ‘이웃’으로 자리하며, 내가 까만 밤의 어둠에 헤맬 때 별자리처럼 거기 존재한다. 나는 사실 그들이 정확히 무얼 하는지 다 알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인 나의 한계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진리의 책을 펼쳐도 미처 그게 진리라는 걸 읽어내지 못하는 한 사람, 어쩌면 바로 그런 사람. 그러나 나는 이 밤에 별자리가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함께 이 도서관이라는 지도가 된다.
최영건_소설가, 미술평론가
백합꽃 먹어보고 싶은 사람. 문학과 미술을 연결하며 여러 책을 펴냈다. ‘텍스트-띵’이라는 말과 함께 《살아 있기에 관한 띵, 띵, 띵》이라는 책을 준비 중이다.
나는 문자 중독자다. 늘 읽고 쓴다는 얘기면 좋겠지만 실은 딴짓을 더 많이 하는 것도 같다. 책 읽어야지 하고는 영화를 보고, 번역해야지 하다가는 음악을 듣는다. 미술 칼럼 써야지 했는데 갑자기 미술관 북 숍에 가서 육중한 그림책을 사버리기도 하고, 문학 칼럼에 실을 자료 사진을 찍으러 부러 멀리 떠났다가 스치는 사람들 목소리나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얼마 전 수술을 앞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함께 갔습니다. 어머니의 병은 심장판막증으로, 혈액의 흐름을 조절하는 판막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지거나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왔지만, 점점 악화되어 심근경색 등을 일으키기 전에 인공판막을 장착하는 것이 좋겠다는 담당 의사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이 나
파도를 바라보는 일이 내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지중해의 항구도시에서 머물던 어느 해 가을의 일이었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이란 별명을 가진 피카소의 고향답게 늘 햇살이 작열하는 곳이었다. 컬러가 선명한 곳은 더없이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그만큼 서늘했다.스페인어는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밖에 모르면서 그 도시에서 석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