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평생 연기를 배워온 한 사람으로서, 철저히 본능에 입각해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이러니함에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다. 이건 반복 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연기가 주는 감동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능 속 극한의 시도가 어째서 이리도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에 가깝다. 여기, 한평생 연기를 배운 적 없이 자신의 직관과 본능에 의지한 채 배역의 모습으로 실존한, 인물의 상황을 맞이하면 자신의 영혼조차 태워버리며 몸을 던졌던 배우가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히스 레저, 본명은 히스 클리프 앤드루 레저이다.
그가 연기한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떠올리면 나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광기 어린 폭발력을 느낀다. 그는 현재 고인이 되었으나, 스크린 속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가 연기한 다양한 인물 군상을 볼 때면 한 인간이 필사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이 담긴 원형과, 동시에 타인이라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인간의 영혼에 닿고자 하는 처절한 투쟁이 느껴진다. 그는 살아생전 한 인터뷰에서 “나는 연기 기법이 없다. 나를 이끄는 유일한 기준은 나의 본능뿐이다”¹⁾ 라고 답했다. 그가 닿고자 했던, 본능적 이끌림을 간직한 인간의 모습은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된 것일까. 그는 배우라는 길 위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자신의 연기에 그 혼돈을 담고자 했으며, 그 혼돈을 담은 모습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비추는 인간의 불완전한 마음이 담긴 인물이었다.
17세에 가족의 품을 떠난 히스 레저는 절친들과 함께 서호주에서 시드니, LA로 배우가 되기 위한 꿈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돈 69센트만 가진 채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여정을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캠코더로 본인의 모습을 찍으며 창대한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자, 이제 우리는 여행을 떠날 거야.”²⁾ 이 순수한 외침은 히스 레저의 예술적 세계관이기도 했다.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진화하려면 어느 정도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그를 자신의 고향 서호주의 지방 퍼스에서 아주 먼 곳, 할리우드로까지 떠나게 만든 것이다.
할리우드로 넘어온 후 본격적으로 여러 오디션을 경험했던 그는 길 정거(Gil Junger) 감독의 하이틴 로맨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주연 패트릭 역을 따내며 하이틴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에이전트이자 동료였던 스티브 알렉산더(Steve Alexander)는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기 위해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역을 제안했지만, 스타가 아닌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배우가 되고자 했던 히스 레저는 과감히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평소 동경해왔던 자신의 우상이자 전설의 배우 멜 깁슨(Mel Colmcille Gerard Gibson)과 부자지간 호흡을 맞출롤란트 에머리히(Roland Emmerich) 감독의 〈페트리어트-늪속의 여우〉라는 대작에 출연할 결심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경험 속에서 위대한 동료 예술가의 모습을 흡수하는 ‘모방’이라는 강력한 성장을 이뤄낸다. 멜 깁슨의 연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호흡을 맞춘 그는, ‘배우가 배역을 연기하기에 앞서 좋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어떻게 거리를 두고 진실하게 인물을 표현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에 대해 깁슨으로부터 진실한 조언을 듣는다.³⁾
히스 레저는 걸작의 무게감 속에서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며 온몸으로 부딪히는 고통 속에서만 배우로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는 두려움을 자유로 인식하고 즐기면서 자신이 동경하던 위대한 배우의 모습으로 도약하기 위해 거장 감독들의 작품성 있는 영화의 배역, 인간의 불완전함을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좇기 시작한다. 그런 그에게 낮은 제작비나 세간의 흥행 기준은 고려해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소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진짜를 연기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러다 만난 작품이 이안(李安)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스페셜 포스터
사랑에 빠진 두 영혼에 관한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 델마 역을 맡기에 앞서, 작품 속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하여 한 동료 배우가 조롱 섞인 야유를 보내자 히스 레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브로크백 마운틴〉의 시나리오를 “성숙하고, 강렬하며, 매우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자 위대한 작품”⁴⁾이라고 말했다. 히스 레저는 작품 속 배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주 원초적이고 위대한 연기적 행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는데, 그것은 “말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 매 순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⁵⁾이었다.
짧은 문장이지만 같은 배우의 입장에서 봤을 때 결코 단순한 문장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있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란 무엇일까? 가슴은 내면의 마음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내면에서 시작하는 말은 과연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어야 할까? ‘터져 나오는 듯’이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진실한 외침인가?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말한다’, ‘소리친다’ 같은 일차원적 표현이 아닌 ‘터져 나온다’라는 아주 직관적이면서도 섬세한 표현은, 그가 연기를 배우지 않았으나 경험과 본능적 감각에 의존한 채 얼마나 순수하고도 깊게 인간을 그리고자 했는지 그 절실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의 말은 이제껏 내가 공부해왔던 연기에 관한 모든 문장 중 가장 아름다운 말이자, 어디에서도 찾아본 적 없는 연기 예술에 관한 한 편의 시 구절과도 같았다.
영화 <다크 나이트> 스틸컷
“나를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은 동시에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킨다”
이제 히스 레저 연기 인생의 마지막 여정,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불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Edward Nolan) 감독의 〈다크 나이트〉 속 조커 역할은 용감한 히스 레저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결정체, 혼돈을 간직한 반사회적 인물. 그는 조커라는 역할의 탄생과 그 인물의 일상적 태도, 습관 등 물리적인 행동과 내면을 구축하기 시작하며 이 인물이 가진 폭력성에 기반한 무의식적 방어기제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제로 어둠 속에서 태어난 인물을 만들기 위해 런던 호텔 방의 커튼을 모두 쳐놓고 자신을 가뒀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 조커에 몰입해 일기장에 일기를 적었으며, 위대한 고전 작품 속 악역들의 모습들을 참고하며 수많은 조커를 자신만의 조커로서 새롭게 모방하기를 시도했고, 사실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해 여러 불완전한 인물들의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다. 그 모든 정밀한 작업을 통해 히스 레저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깊고, 진실하게, 조커라는 인물의 퍼즐 조각들을 구축해나갔다. 마침내 자신의 신체와 본능의 에너지를 극단으로 끌어올려 조커를 표현한 그는 사후에 〈다크 나이트〉 속 조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실제로 촬영 현장에서 히스 레저를 본 사람들은 혼돈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면 그는 다시 순수하게 자신으로 돌아와 다음 촬영을 준비했는데, 그 간극 사이에서 동료들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배트맨 역할의 크리스천 베일(Christian Charles Philip Bale)은 심문을 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때리지 않고 연기해도 괜찮다고 했으나, 히스 레저는 계속해서 베일의 신경을 긁으며 “나를 때려라, 나를 때려라”라고 파괴적으로 그를 몰아붙인 후 그에 반응한 베일과 극한의 상황을 만들어 취조실의 명장면을 만들었다.⁶⁾
영화 속 인물에 대한 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집착으로 그는 시대의 불안성을 안고 있는, 현실의 밑바닥에 놓인 불완전한 인물 조커의 근원적 얼굴을 그려냈다. 연기라는 예술을 보편적 순응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을 넘어, 그는 한 인물에 지독히 도취된 채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가며 극단의 시도를 해왔다. 이것이 단순한 비극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히스 레저가 인간을 극단적으로 깊이 들여다보고 진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태도가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아쉽게도 그 위대한 배우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연기의 영역, 배우로서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치른 깊은 투쟁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라는 배우의 정신에 계승되어 온다. 자신의 꿈을 좇던 한 인간의 진실한 투쟁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예술가에게는 빛나는 별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이 저물어가고 사라지는 가속화 시대에 그가 표현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떠한 모습으로 실존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스크린 속 불사신 히스 레저는 분명한 정답을 내어주는 대신 언제나처럼 혼돈의 질문을 건네올 것이다.
“……당신, 가슴이 터질 듯이 진실을 좇고 표현하며, 그 속에서 깊은 타인을 느껴보라고.”
¹⁾ 히스 레저, 《무비라인(Movieline)》 2001년 6월호 인터뷰 중. ²⁾ 히스 레저, 다큐멘터리 《아이 엠 히스 레저(I Am Heath Ledger)》(2017) 중. ³⁾ 히스 레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07년 11월 4일 자 인터뷰 중. ⁴⁾ 히스 레저, 〈브로크백 마운틴〉프레스 컨퍼런스 인터뷰 (2005년) 중. ⁵⁾ 히스 레저, 《브로크백 마운틴》 프레스 컨퍼런스 인터뷰 (2005년) 중. ⁶⁾ 크리스천 베일 인터뷰, 조셉 매케이브 저, 《배트맨 팬이 알아야 할 100가지》(2017) /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 2017년 10월 재인용.
강봉성_배우
연출가·작가·배우로서 언어 너머의 존재에 관한 진실을 탐사하며 작업해왔다. 독립영화사 ‘마음’과 극단 ‘여백’을 창립해 상실과 애도, 기억과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무대 위와 카메라 앞에서 표현하며 동료들과 연대하고 행위하고 있다. 인간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이야기들이 세상에 틈을 만들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작 작업을 하고 있다.
[다독가들]은 독서가 한 개인의 인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독서의 중요성, 책과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문가 인터뷰 코너이다. 책 이외에도 인터뷰이의 전공이나 관심사에 관한 질문 또한 추가된다. Q 독서와 연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A 독서와 연기 행위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 본다. 두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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