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다. 세계적인 기록 관리 및 아카이브 관련 전문 학술 단체미국기록관리자협회(SAA, Society of American Archivists)에서는 공식 학술 용어 사전 사이트인 ‘기록학 용어 사전(Dictionary of Archives Terminology)’을 통해 기술적인 변화가 문서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문서(document)는 전통적으로종이에 기록된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대의 문서는 종이만이 아니라 모든 미디어와 형식을 포괄한다. 사진과 그림, 음성 녹음, 동영상은 물론 텍스트 문서 파일, 스프레드시트, 웹페이지, 데이터베이스 보고서 등도 문서로 간주된다.
문서의 미디어와 형식이 확장됨에 따라, 문서의 시간성도 변화했다. 대표적으로 문서로 여겨져 온 ‘종이책’의 시간은 첫 페이지로부터 그다음 페이지를 거쳐 마지막 페이지로 흐르기를 요청받는다.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예외적인 독자가 있기도 하고, 페이지 자체를 미로나 수수께끼 등의 게임으로 삼는 게임북(game book)처럼 다른 시도를 하는 책들, 다양한 아트북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페이지의 규칙은 여전히 1로부터 2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글과 말이 시작과 끝을 가진 선형적인 시간을 품고서 빚어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언어로 된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기록한 문서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오랫동안 이것이 문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변화는 문서의 시간을 시작에서 끝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다른 방식으로도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앞서 미국기록관리자협회에서 제시한 ‘문서’의 개념에는 ‘웹페이지’가 포함된다. 웹페이지는 동적 문서(dynamic document)로서,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문서로 여겨진다. 한번 종이책으로 인쇄된 기록이 오래오래 불변하며 보존되기를 지향하고, 나아가 그것을 당연시해온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문서는 이제 인터랙티브한 물리적 시공이자 참여의 장에 가까우며, 참여자는 이 시공의 텍스트를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사실은 문서가 수행해온 기록과 보존이라는 중대한 역할과 기묘한 긴장을 빚어낸다. 기록된 것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다시 쓰이게 된다면, ‘보존’은 어떻게 되는 걸까? 웹페이지를 문서로 여기는 이 정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생성시키며 역동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문서화란 무엇인가(What Is Documentation)》, 수잔 브리에(Suzanne Briet), 1951
‘영양’들의 도서관
마담 문서(Madame Documentation)라는 별명을 지닌 저명한 문헌학자이자 사서, 역사가, 시인인 수잔 브리에(Suzanne Briet)는 1951년 저서 《문서화란 무엇인가(What Is Documentation)》의 첫머리에서 문서란 ‘물리적 또는 지적 현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며, 또는 증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존되거나 기록된 모든 구체적, 기호적 지표’라고 말했다. 이에 기초해 수잔 브리에가 ‘초원의 영양은 그저 영양이지만 동물원의 영양은 문서가 된다’는 문서에 대한 중요하고 선언적인 정의를 이끌어낸다. 수잔 브리에의 문서 개념은 이후 시간이 흘러, 브루노 라튀르(Bruno Latour)의 사물의 행위성과 더불어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금 중요하게 돌이켜진다. 문서를 단순히 사람에 의해 작성된 수동적 텍스트로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서는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gent)로 자리한다.
그런데 수잔 브리에의 선언적인 문서 개념은, 문서들이 모여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도서관과 함께 떠올려보았을 때 재미있는 장면을 상상시키기도 한다. 도서관은 대개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현대 문헌정보학에서는 도서관의 역할을 코덱스 형태의 단행본 종이책을 수집하는 데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학술 논문, 정부 간행물, 지도, 마이크로필름, 디지털 텍스트, 아카이브 자료 등 다양한 ‘문서’가 모여 사람들과 교차하는 장소가 도서관이다. 그런데 실은 문서의 범위가 종이책에서부터 웹페이지, 영양이나 호랑이까지 넓다면, 우리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장소조차도 실은 도서관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무엇이 문서인지에 대한 정의는 살아 있는 생물을 ‘문서’라 분류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지점이다. 예컨대 인간을 연구하려는 외계의 ‘촉수 괴물’에게 갇혀 연구당하고 있는 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새벽》과 수잔 브리에의 문서 개념을 교차시켜본다면, 인간은 문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SF적으로 공상된 외계의 존재에 의해 벌어진 일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문서로서 다뤄진 순간들은 대개 일방적이고 비극적인 폭력을 포함한다. 불과 백여 년 전, 사람들은 사람을 동물과 더불어 전시했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일방적인 폭력이 사람의 신체를 훼손해 박물관에 두기를 자행했다. 문서는 얼마든지 폭력과 타자성을 체현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
최초로 작성된 고대의 문서들은 세금과 자산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자산 기록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 어떤 자산은 문서로만 실재하고, 실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이미 사라진 존재가 문서를 통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AI와의 협업으로 사어를 되살리는 프로젝트들이 있다. 나는 최근 《텍스트 불멸》(가제)이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문서가 살아나가고, 되살아나는 일에 대해 쓰는 중이다. 이 소설에는 이미 죽어 사라진 말, 사어(死語)를 그것을 기록한 문서를 통해 되살려낸 사례들과, 글의 시간을 살아나가는 인간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나와야 한다).
사람의 몸이 살아가는 현실의 시간을 일상이라고 부른다면, 글의 시간은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시각예술과 문학을 가로지르고 연결한 작가 차학경은 그녀의 책 《딕테(Dictee)》에서 실제의 시간을 폐기하는 글의 시간에 대해 썼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일상을 사는 동시에 그것과 다르게 흐르는 글의 시간을 살아간다. 현실에서 시간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글의 시간은 앞날과 지난날을 서슴없이 오가고, 근본적으로는 언제나 과거와 연루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의 문장을 쓰는 순간, 그 순간은 휘발되고 문장만이 그 자리에 남는 까닭이다. 그러니 글은 일상과 다르게 흐른다. 쓰기는 인간이 시간의 가차 없는 선형성에 응답하는, 또 다른 시간성의 몸짓이다.
글의 시간에 대한 차학경의 선언적인 접근은 글쓰기를 통해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 타의에 의해 문서가 될 때, 그것은 쉽게 폭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편으로 작가가 글을 쓰는 일은 근본적으로 글로써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텍스트와 문서는 서로 동의어가 아니지만, 아무렴 글쓰기가 문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다. 그렇다면 작가는 스스로 인간이자 문서로서 자신을 확장(expand)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개념적으로 말한다면 ‘확장된 몸(expanded body)’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책이 작가의 확장된 몸이라면, 문서들로 가득한 곳은 결국 사람들로 가득한 곳일 테다. 도서관에는 인간의 몸으로 그곳에 온 이들과 책의 몸으로 그곳에 온 이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어떤 시간은 3차원 지구의 현실의 중력을 따라 흐르고, 어떤 시간은 페이지의 중력을 따라 흐른다. 쓰는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에 머물려 한다면 그는 거기 영영 머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문서의 시간, 쓰고 읽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어나가 온 특별한 시간이다.
최영건_소설가, 미술평론가
백합꽃 먹어보고 싶은 사람. 문학과 미술을 연결하며 여러 책을 펴냈다. ‘텍스트-띵’이라는 말과 함께 《살아 있기에 관한 띵, 띵, 띵》이라는 책을 준비 중이다.
도서관에 대한 단서들도서관과 지도(atlas)가 서로 닮았다는 걸 알아챈 한 사람이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에 대한 이야기다. 바르부르크 문화학 도서관은 그의 프로젝트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와 함께 사고의 기계로서의 아카이빙을 이야기한다. 바르부르크 도서관의 책들은 십진분류의 주제별 숫자나 저자명 순으로 배치되지 않았다. 대신 ‘좋은
"번역도 하고 영문학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독서모임도 하고, 참 다양한 일을 하시네요.” 처음 만난 이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참 다양한 일을 한다는 말. 대체로 나는 하하, 그렇다고, 단 하나에 매섭게 몰두하는 편이라기보다는 이 일에서 저 일로 철새나 물고기처럼 이동하면서 나 스스로를 조금씩 변모시키는 쪽을 더 편안해한다고, 명징한 전문성이나 정
1입이 허공에 걸려 있다. 이 입은 거대한 입이고, 멈추어 있지 않다. 비어 있는 파장으로 표현된 입은 견고한 금속에 의해 세공된 데드-마스크(Dead Mask)처럼 보인다. 2Empty Wave(공파, 空波)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양자역학의 한 개념이다. 위키피디아를 참조하면, 이것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 부로이(Louis Victor P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