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짓는 데 예산 19억 元(한화로 약 810억 원/26.09.03 기준)을 다 써버려 책을 살 돈이 없었어요.”
가오슝시립도서관의 건축 과정에 관한 설명을 마친 이진양(李金鴦, Lee Chin-Yang) 관장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건물을 짓느라 정작 그 안에 들어갈, 도서관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을 사들일 예산까지 다 써버렸다니. 당황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이진양 관장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시민들한테 도서관에 넣을 책이 없으니 기부를 해달라고 했죠.”
그렇게 시작한 장서 기부 캠페인을 통해 100만 권에 달하는 책과 기금이 모였다. 시민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책을 기부하는 건 물론이고 배송지를 도서관으로 설정한 뒤 온라인 서점에서 책들을 사 보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이 다르게 보였다. IMF 외환 위기 때 외채를 갚기 위해 벌였던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는데, 규모도 목적도 다르지만 서가에 책을 채우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는 그 하나 된 마음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민들이 기부한 책으로 채워진 서가 ⓒHarrison Chang
도서관에 숲을 들여놓다
이진양 관장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방문한 날, 가오슝에는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초록 잎 가득한 도서관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서관에 간 것은 인터뷰를 하기 전에 미리 도서관을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이전에도 가본 적은 있지만 취재를 목적으로 방문하니 어쩐지 도서관이 낯설게 느껴져 조금 긴장이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렸다. 서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중앙 통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초록 물결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도서관 중앙에 놓인 몇 그루의 나무가 유리창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마치 세잔이 그린 프로방스 풍경 속 가로수처럼, 고흐가 그린 우아즈 강변 풍경 속 나무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유리창에 바투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숲의 안쪽까지 들어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인터뷰 약속이 없었다면 몇십 분이고 그 상태로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 중정의 나무들 ⓒHarrison Chang
그나마 발을 떼기가 그리 아쉽지 않았던 건 창가 어디에서나 나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쪽 통창 앞에는 방문객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책상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창 너머 발코니에도 키 작은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책상 앞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자기 일을 하다가 고개만 들면 초록 잎 무성한 나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창밖으로 나무들이 마주 보이는 창가 자리 ⓒHarrison Chang
이진양 관장의 말에 의하면 이 가오슝시립도서관을 설계한 건축가 류페이선(劉培森, Liu Pei-Sen)은 설계 전에 시민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들이 원하는 도서관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공간에서 책을 읽고 싶은가.
“많은 시민들이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도서관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요.”
옥상에서 본 창가의 나무들 ⓒHarrison Chang
세계 최초의 현수식 녹색 건축, 공중에 매달린 도서관
건축가는 ‘나무 아래에서 독서하는 느낌’을 구현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지구의 나무를 살리는 방향으로 도서관을 설계했다.
“가오슝시립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현수식 녹색 건축물이에요.”
나는 건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이진양 관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어쨌든 보통의 작업은 아닌 것 같군,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는데, 그 뒤에 이어진 설명을 듣고 직접 관내를 돌아보고 나서야 이 도서관이 건축물로서 어떤 차별점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수식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쌓아가며 짓지 않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짓는 탑다운 방식으로 시공된다. 강철 케이블에 의해 지지되는 형식의 현수교를 떠올리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겠다. 그러니까 거대한 강철 케이블이 각 층의 바닥을 공중에 매달고 있는 구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꺼운 기둥이 없는 1층에서 시원한 개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두꺼운 기둥이 없이 시원한 개방감을 주는 1층 외부 공간 ⓒWIKIPEDIA
현수식 건축물은 일반 건축물에 비해 설계도 시공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데다가 비용도 훨씬 많이 든다. 하지만 건물의 하중을 견뎌야 하는 내부 기둥이 없으므로 공간을 비교적 넓고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자연광이 안쪽 구석까지 도달해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진을 견디는 데도 무척이나 유리하다. 지면에 건물이 붙어 있지 않고 각 층이 공중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강한 지진이 오더라도 상부 케이블이 충격을 흡수해 분산시킨다. 덕분에 건물은 천장에 매달린 시계추처럼 좌우로 유연하게 흔들린다.
공간을 넓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도서관 내부 ⓒWIKIPEDIA
대만은 지진이 잦은 나라 중 하나다. 가오슝이 있는 남부는 타이베이나 화련이 있는 북부보다는 지진이 적은 편이지만 자연재해 앞에서 확률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2016년 2월 6일 새벽, 대만 남부의 땅이 거세게 요동쳤다. 진앙지는 가오슝의 메이농 구, 진도는 6.4. 이는 가오슝 내륙에서 발생한 지진을 기준으로 역사상 가장 강한 지진에 속하는 것이었다.
진앙지는 가오슝이었지만 바로 옆 도시 타이난의 피해가 더 컸다. 도서관 취재에 동행한 해리슨(Chang Harrison)은 그날 친구와 함께 타이난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한참 잠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고, 이내 침대에서 몸이 튕겨 나갈 만큼 건물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고 해리슨과 친구는 다시 잠이 들었지만 그 시각 같은 도시의 17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파트 주민 115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파트의 붕괴 이유는 건물의 부실 공사 때문이었다.
가오슝시립도서관은 진도 7의 지진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진양 관장의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그제야 왜 이 건물을 짓는 데 그렇게나 많은 예산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곳에서 작가를 배출하는 곳으로
가오슝시립도서관은 정부 관할의 공공도서관으로 시작했지만, 2017년 대만 최초로 행정법인으로 전환해 운영하고 있다. 가오슝시립도서관이 ‘총관’의 역할을 맡아 가오슝시 내의 다른 도서관, 즉 ‘분관’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 또한 대만 최초의 시도이다.
“저희는 행정법인이기 때문에 이익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서관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어요.”
그제야 나는 1층에 있는 밀크티 가게와 3층의 기념품 가게, 그리고 다리로 연결된 별관 내의 서점과 영화관 등이 도서관에 있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공공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기에 의아했는데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기념품 가게에 대해 설명 중인 이진양 관장 ⓒHarrison Chang별관 내 까페와 서점 ⓒHarrison Chang
가오슝시립도서관은 행정법인으로 전환한 이후 다양한 문화 기획 사업을 추진해왔고 지금도 활발하게 실행하고 있다. 그림책 만들기 강의도 그중 하나인데,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의 작품을 관내에 전시하기도 하고 일부 우수작은 출판사를 통해 정식 도서로 출판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한다. 단순히 배움을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작가를 배출하는 것까지 도서관에서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대만 내 다른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가오슝시립도서관만의 독특한 행보이다.
우수작에 선정되어 정식 도서로 출판된 그림책들 ⓒHarrison Chang
202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독서 축제 ‘가오슝 도시 책 박람회’는 무더위가 한풀 꺾인 가을, 도서관 1층 외부 공간에서 열린다. 세계의 작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토크쇼와 강연, 낭독회는 물론이고 인디 밴드와 거리 극단의 공연도 볼 수 있다. 독립 서점과 대형 출판사, 그리고 크리에이터들이 운영하는 부스도 설치되어 그들이 판매하는 희귀 도서와 독립 출판물, 굿즈 등을 직접 보고 구매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국제도서전이나 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하는 문학 포럼 등을 통해 독자가 이런 식의 행사를 접할 기회가 있지만, 이 모든 걸 도서관에서 기획하고 실행한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민들이 도서관을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도서관 문턱을 낮추는 일은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낮추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가오슝 도시 책 박람회 홍보월 ⓒHarrison Chang
9월이 되었지만 가오슝의 한낮 기온은 32도까지 올라간다. 여름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기만 하다. 하지만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도시의 공기에서는 익숙하고도 낯선 기미가 느껴진다. 어딘가 무겁고 어쩐지 서늘한.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미약하게나마 가을의 냄새를 맡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가을의 그림자가 한층 더 짙어질 그날, 도서관 1층 광장에 모여들 사람들을. 그리고 고요한 도서관 앞에서 벌어질 떠들썩한 축제의 풍경을.
김가람_작가, 브랜드 에디터
수원에서 태어나 도쿄를 거쳐 현재는 가오슝에 거주 중이다.
소설을 쓰며 펫푸드 브랜드의 제품을 글과 콘텐츠로 풀어내고 있다.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의 공립도서관 페르메커(Permeke)를 방문했다. 앤트워프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벨기에의 심장과도 같은 이 도시에 대해 짧게 설명부터 하고 시작하겠다. 앤트워프는 유럽 전체에서 물동량으로 로테르담과 치열하게 1, 2위를 다투는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벨기에의 GDP를 끌어올리는 가장 부유한 도시이다. 벨기
8월 목포, 용해동 갓바위문화타운은 여름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이곳은 목포의 역사와 예술, 생활문화를 품은 문화예술 복합지구다. 목포문학관을 비롯해 남농기념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문예역사관 등 여러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어 다양한 목포 문화의 아름다운 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목포의 문학적 기억을 응축해 보여주는 목포문학관은 푸
4년 전,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알토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연고 없는 이국땅에서 생활한다는 게 녹록지 않은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 수시로 불쑥불쑥 밀려드는 외로움과 헛헛함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 사회적인 활동 공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외딴 섬에 갇힌 듯한 소외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나는 마치 한국에서 28년 동안 살면서 하나하나 획득했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