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책과 도서관, 독서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네이버영화
묘한 인연의 끈이 된 러브레터
홋카이도 오타루에 사는 후지이 이츠키의 집으로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라는 내용의 편지가 배달된다. 보낸 이는 고베에 사는 와타나베 히로코. 이름을 들어본 적 없거니와 고베에 사는 지인도 없는 이츠키는 이를 수상쩍게 여기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이끌려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로 한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감기 기운이 좀 있지만요.’
해프닝이었다. 사실 이 편지는 히로코가 2년 전 죽은 옛 연인의 중학교 졸업 앨범에서 발견한 주소로 옛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주소엔 옛 연인과 동명이인의 인물 이츠키가 살고 있고, 이 작은 해프닝으로 천국에서 온 편지라고 믿는 히로코와 이츠키의 묘한 펜팔이 시작된다.
하지만 히로코의 달콤한 꿈은 막을 내리고 만다. 옛 연인의 친구이자 히로코의 새로운 연인인 아키바가 히로코의 이름으로 이츠키에게 진짜 후지이 이츠키라는 증거를 보이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에 이츠키는 사진이 담긴 신분증 사본을 보내고, 히로코는 편지를 보낸 후지이 이츠키가 죽은 옛 연인과 동명이인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수상한 편지를 주고받던 이츠키는 문득 오래 전 낡은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동명의 남자아이. 그리고 동명이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식 이후 줄곧 반 아이들의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식의 놀림을 견뎌야 했던 나날들. 이름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받아야 했던, 마치 ‘아우슈비츠 감옥 속의 아담과 이브’와 같았던 중학교 시절은 이츠키에게는 그다지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지만,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히로코를 위해 그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기로 한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네이버영화
후지이의 도서 카드 장난,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시’
반 아이들의 유치한 장난으로 도서위원이 된 남자 후지이 이츠키와 여자 후지이 이츠키. 하지만 남자 후지이는 도서관 일을 좀처럼 돕지 않았고, 무척이나 독특한 취미에만 푹 빠져 있었다. 그건 바로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시’ 수집이었다(‘스트레이트 플러시’는 포커에서 숫자가 나란히 이어지고 무늬가 같은 카드 다섯 장을 가리키며, 남자 후지이는 아무도 빌리지 않을 듯한 책을 빌려 각 도서 카드에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을 남기는 장난을 함). 후지이는 ‘아오키 콘요의 전기라든가, 말라르메의 시집이라든가, 와이에스의 화집이라든가, 그런 것. 요컨대 절대로 아무도 빌려가지 않을 것 같은 책’을 빌려 자기의 이름만 쓰인 도서 카드를 모으고 있었다. 실제로 후지이가 빌린 다테가즈오의 《가와다료키치전》, 모리시타 켄의 《제니고라고 불린 남자》, 김지영・야마카와 쓰토무의 《한일합병과 아리랑》, 가스야 후지카즈의 《금공품 제도법》, 그리고 그가 훗날 이츠키에게 자기 대신 반납해 달라고 부탁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장르도 쓰인 시대도 각기 다른 책들이었고, 도서 카드에는 오직 후지이의 이름만 쓰여 있었다.
이츠키 기억 속의 후지이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하굣길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이츠키의 뒤를 쫓아와 밀가루 포대를 씌우고 도망을 가기도 했고, 100미터 달리기 선수였던 그는 등교 중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다리가 복합골절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시합에 난입해 트랙 위를 질주하기도 했다.
이츠키는 히로코로부터 후지이가 뛰었던 운동장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중학교를 찾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은사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을 들르는데, 이츠키는 도서위원 후배들 사이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 있었다. 후배들이 그녀에게 보여준 건 ‘후지이 이츠키’의 이름이 쓰인 도서 카드들. 무려 87장이나 발견했다며 신나하는 후배들에게 친구의 장난일 뿐이라는 이츠키의 설명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뿐이었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네이버영화
도서관에 남은 ‘잃어버린 시간’
후배들과 같은 오해를 하는 선생님에게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장난이었다고 설명하자, 선생님은 이츠키에게 몇 해 전 후지이가 산악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츠키는 중3 겨울에 지독한 감기를 앓다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날 밤 이츠키는 갑작스럽게 감기 증세가 악화돼 쓰러지고, 히로코는 후지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아키바와 함께 그가 조난당한 산으로 향한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히로코가 설원에서 후지이에게 안부를 전하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이츠키도 후지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그에게 같은 안부 인사를 전한다. 이츠키는 부친상으로 학교를 쉬고 있던 때 후지이가 집으로 찾아왔던 날을 기억한다. 후지이는 이츠키에게 자신이 도서관에서 빌렸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신 반납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직접 반납하라는 이츠키의 말에 그럴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고, 이츠키는 장례를 마친 후 오랜만에 등교해 후지이의 전학 소식을 듣는다.
그것이 후지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더 이상 히로코와 공유할 기억은 없었고, 히로코도 이츠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간 그녀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돌려준다. 자신이 아닌 이츠키의 추억이기에.
그날 오후, 도서관에서 만난 후배들이 이츠키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들이 이츠키에게 보여준 건 후지이 이츠키의 이름이 쓰인 도서 카드였다. 이츠키가 후지이의 부탁으로 도서관에 반납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 카드. 카드 뒷면엔 이츠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츠키가 후지이의 ‘첫사랑’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이 이야기는, 결국 히로코에게는 공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츠키와 후지이의 ‘잃어버린 시간’은 아마 이후로도 도서관에 그대로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이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찾아냈던 것처럼, 또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아니 그녀의 이름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도서관은 그 둘의 ‘잃어버린 시간’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우승미_번역가
일본어 번역가. 와세다대학교 유학을 계기로 일본에서 거주하며 번역 일을 하고 있다. 고양이에 관심이 많고, 최근 옮긴 책으로 《5번 레인》(은소홀 글, 노인경 그림), 《지구에서 한아뿐》(정세랑)이 있다.
[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남자의 책, 198쪽의 주인공 ‘그녀’는 이름보다 ‘저기요’라는 말이 더 익숙한 8년차 도서관 사서다. 고시공부 하는 남동생에게 용돈을 보내느라 생활비가 부족해 핸드폰도 정지시켜야 하는 그녀의 삶엔 도통 즐거울 일이 없다. 출근길에 자전
꽤 오래전 소피 칼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적이 있다. 사진과 글을 활용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질 때여서 그의 책이 좋은 레퍼런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였다. 하지만 책을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나는 이내 흥미를 잃고 말았다. 세련되고 도발적이며 매혹적인 작가의 이미지와 달리 실제 내용들이 상당히 자기 파괴적이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깊이까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이야기하는 방식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를 모두 다 보았고, 볼 때마다 좋은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판단했지만, 반복해서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5년 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의 경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