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책을 만드는 편집자라고 답하면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많다. 어떤 책을 만들고 있냐는 이어지는 질문에 ‘과학책’이라고 말하면, 반짝이던 눈빛이 이내 차갑게 식는다. 사실 과학책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대형 서점에 가더라도 가장 구석 작은 코너에 위치하고, 도서관에서도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처음부터 과학책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어린 시절 퀴리 부인 혹은 아인슈타인의 위인전을 읽었거나, 달걀을 품고 있었다는 에디슨,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에 당신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지는 않았는지.
그림을 그려보아야 미술에 소질이 있는지를 알게 되듯, 청소년이 자신의 꿈을 키우는 데는 세상에 어떤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알아야 한다. 청소년이 갖고 싶어하는 직업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으로 연예인, 의사, 변호사,공무원 등이 있다. 연예인은 화려한 삶을 보여주고, 의사와 변호사 같은 전문직은 빠르게 부자가 될 수 있고, 공무원은 직업이 안정적이라 선호하는 것일 텐데, 그것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매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보고 들은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청소년일 때 신문방송학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청춘 드라마의 영향으로 한동안 신문방송학과의 경쟁률이 치솟았고, 유명한 의학 드라마의 배경이 된 지방 의과대학은 방송된 해 입시 경쟁률이 최고에 달했다. 어떤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꿈을 키우고, 어떤 사람은 책이나 신문, 뉴스에서 접하는 소식을 통해 꿈을 키워나간다.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으로 많은 학생이 수학자의 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의외의 현상은 아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과학 그림책에서 흰 가운을 입고 알코올램프를 가열하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보고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물리학자를 꿈꾼 적이 있었다(사실 흰 가운을 입고 알코올램프를 사용하는 과학자의 모습은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아닌 화학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과학과 만났을까
모든 과학자가 과학책을 보고 과학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UCLA의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은 어린 시절 〈스타워즈〉를 보고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고, 수학 난제의 실마리를 밝혀 세계가 주목한 천재 수학자 김민형은 수학자가 아닌 철학자를 꿈꾸었다.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인잡〉으로 주목받은 천문학자 심채경은 자신의 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에서 자신은 《코스모스》를 끝까지 읽지 않았노라고 용기 있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에게 천문학과의 만남은 우연한 순간 찾아왔다.
‘내게 있어 우주와의 랑데부는 완전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서점에 갔다가 무심결에 다양한 성운과 은하 사진으로 가득한 과학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랑데부의 시작이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우주를 담은 사진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천문학의 세계에 도킹해 있었다.’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심채경 지음, 문학동네, 2021), 172쪽.
세계에서 주목받는 다섯 명의 한국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에 등장하는 과학자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학을 잘해서, 1지망에서 떨어져서, 새로워 보여서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물리학자가 된 것은 그저 어쩌다 물리학을 배웠기 때문은 아니다. 시인을 꿈꾸었던 물리학자 김현철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다가갈수록 시와 물리학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느꼈다. 물리학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꿈이 그곳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시와 예술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듯이 물리학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애쓴다. 그러니 예술과 물리학은 필연적으로 서로 닮았다.’
―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김영기 외 지음, 세로북스, 2022) 중 〈시인과 물리학자〉(김현철), 120쪽.
우리는 어떤 과학책을 만나야 할까
어떤 사람은 《코스모스》는 너무 뻔하고, 《이기적 유전자》는 너무 낡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과학책이 여전히 가치 있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물학 교과서에서 벗어나 리처드 도킨스라는 이름을 통해 생물학자의 깊이를 알아가고, 칼 세이건을 통해 천체망원경에서 벗어나 천문학이 다루는 아름다운 우주의 세계에 잠시나마 도킹할 수 있다면, 그 책들은 내용에서 벗어나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 물리 과목을 좋아했고, 여느 학생과 다르지 않게 생물 과목은 암기용인 쉬운 과목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생물학 수업》(장수철·이재성 공저, 휴머니스트, 2015)이라는 책을 편집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생물학 입문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생명의 정의가 매우 협소했으며 그 경이로움을 모르고 있었던 것에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있다.
꽤 오래 전 한반도의 지질 연구 역사를 다룬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최덕근 지음, 휴머니스트, 2016)이라는 책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나이가 지긋한, 미용실 사장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분은 책에 등장하는 지질학적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문의 전화를 했다. 은퇴하고 한반도의 지질학 연구지를 찾아가는 것이 꿈이라고 수줍게 덧붙이셨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오랜 연구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만든 책이었는데, 꽤 많은 중년 독자에게 지질학자의 꿈을 심어주었다. 나이를 뛰어넘어 아직도 꿈꿀 수 있는 순간을 안겨준, 책이 가진 힘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과학이라는 깊고 아름다운 우주를 만나는 순간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과학책은 과학 필독서 리스트나 물화생지 중심의 교과서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 학생 독자들이 모두 교과서 진도에 맞게 쓰인 (출판사가 주장하기에) 쉽고 재미있는 과학책을 읽느라 과학에 호기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두꺼운 과학책을 호기심에 잠시나마 펼쳐볼 수 있기를.
어렵고 두꺼운 책의 모든 행간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사진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빼곡하게 알 수 없는 수식으로 가득한 페이지를 보며 호기심을 갖거나, 지적인 문장에 취해 마치 나만 아는 비밀을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 책은 충분히 역할을 다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신체적인 조건을 이겨내고 과학자로서 당당히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만났다. 특별한 아이로 태어나 천재성을 보여주는 특별한 사람만이 과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고 있다.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물리학의 세계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우아한 우주가 무엇일까 떠올려보고,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를 통해 다중 우주의 세계가 멋지다고 느끼며, 〈인터스텔라〉를 통해 평행 우주가 궁금해진다면 과학을 이해하는 것보다 좀 더 과학자의 길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과학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자의 길에 들어선 된 뒤 꽤 오랜 시간 동안 겪게 될 끝나지 않은 여정과 같은 것일 테니 말이다.
고백하건대 누군가 내게 과학책을 추천해달라고 묻는다면 가장 상단에 《코스모스》를 두고 있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벽돌책이라고 부르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과학책이 당신 책장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과학자가 될 준비는 충분하다. 이제 당신의 아이가, 혹은 당신이 과학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그 책을 펼쳐서 또 다른 우주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임은선_편집자, 작가
편집자, 작가. 과학 출판사를 거치며 오랫동안 과학책을 만들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과학책 만드는 법》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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