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스토리' 코너에서는 에세이스트 김나리가 도서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발랄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해질 무렵 오거리에서 정장을 멋있게 입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도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모두 약속하지 않은 우연한 자리였다. 그는 어느 장소에서든 정갈하게 정장을 갖춰 입었다.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입고도 그다지 불편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가볍게, 가뿐한 움직임으로 쉴 새 없이 어딘가로 걷고 있는 사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앞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슥 접어 올리고, 재킷은 서류 가방을 든 손에 걸쳐놓고, 가느다란 넥타이는 느슨하게 내린 채였다. 여전히 바쁘게 다니는 사람이구나. 오래전 보았을 때 기억에 남은 인상이 지금까지 여전하다는 게 느껴졌다. 늘 바쁘고, 자신의 바쁨을 아끼는 마음으로 챙기는 사람. 지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 유독 더 피로해 보였다.
우리는 만나서 함께 시작하는 일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 시간이 비는 내가 이 낯선 도시로 찾아간 것이었는데, 이 도시에는 온통 높은 빌딩뿐이었다. 약속 장소인 오거리의 파출소 시계탑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주변 카페들이 모두 너무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여서 오히려 선뜻 들어가기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옷차림새가 누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기다리며 시계탑 앞에서 핸드폰을 보며 서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가 동동걸음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가 늦은 것에 대해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많이 늦은 편도 아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앞머리가 땀으로 이마에 붙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려 말했다.
“저 원래 늦는 거 좋아해요, 기다리는 게 마음이 편해요.”
마음 편하라고 그렇게 말을 덧붙였더니 오히려 그는 더욱 미안해하며 연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곤란해했다. 그의 빨간색 넥타이가 조금 풀어지며 가슴팍에 만들어진 동그란 공간이 예뻤다. 너무 예뻐서, 혹시 일부러 저러고 다니는 걸까. 나는 사과하는 그를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마터면 그 안으로 손을 뻗을 뻔했다. 어쩌면 원 안으로 손을 뻗는다는 게 그만 그의 목울대나 쇄골을 만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물론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물론이지.
“아 저기, 늦었는데 이런 말씀 정말 죄송하지만요, 지금이 5시 15분이라서요.”
“네, 우선 가까운 카페에 들어갈까요? 제가 기다리면서 잠깐 주변을 걸어봤는데요.”
“아니, 긴말이 어렵네요. 지금 5시 15분이라서 제가 우선 도서관에 빨리 다녀와야 합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바로 요 앞이에요. 죄송해요. 도서관이 오늘 5시 반까지라서. 정말 가까워요! 여깁니다, 저 앞이요!”
그는 서류 가방을 들고 게걸음으로 옆으로 뛰면서 사라졌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무단횡단을 했다. 그리고 정말 금방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무슨 일이었냐고 내가 묻기도 전에 곧장 설명해주었다.
“아 제가, 낮에 시를 한 편 썼는데요. 그걸 등록하고 왔어요. 다른 사람이 비슷한 걸 생각하고 미리 등록할 수 있잖아요.”
“시를 도서관에 등록해요?”
“네, 저희 도시는 도서관 로비에 시 등록 자동화기기가 있어요.”
남자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시를 많이 쓴다고 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당선 같은 본격적인 프로의 자격이 없어도, 누구나 시를 쓰고, 그 시를 자신의 것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방법도 간단하다. 시 등록 자동화기기 카메라 앞에서 시를 적은 종이나 핸드폰 메모장을 열십자 모양 카메라 렌즈 초점에 맞추면, 그대로 스캔이 되어 기기가 읽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10.5포인트 신명조체로 저장되었다. 등록창이 뜨면 이름이나 필명을 입력할 수 있고 완료되는 순간 청구기호와 함께 도서관 이북 발행 대기 번호가 발생했다. 누구든 도서관 로비 기기 앞이나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모두의 시를 열람할 수 있었다. 그 시를 어딘가 사용하고 싶다면 시인에게 저작권료를 내야 한다. 개인이 사용할 때는 일부분을 시청에서 지원해주고, 방송이나 단체, 기업 등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시계탑 아래서 남자를 기다릴 때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이 도시에는 거리의 보도블록에도 줄 맞춰 시가 적혀 있었다. 구청에서 대규모로 시를 구입한 것이다. 시를 등록한 사람들은 독자가 생기는 기쁨과 부수입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요, 결국 많이 등록할수록 좋아요. 쓰고 나서 무조건 등록하는 거예요. 내가 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하고 비슷하게 쓰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계속 쓰게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시가 좀 궁금해지고 그래요. 아무래도 유행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고요. 인기가 많아서 팬클럽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면 시에서 팬클럽 운영비 같은 걸 좀 주는데, 그걸로 낭독회도 하고 소정의 작가 창작 지원금으로 지출할 수 있어요.”
“아, 그럼 다들 시를 쓰는 건가요?”
“네, 일단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못 끊어요. 재밌어서. 왠지 좀 멋지기도 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는 나와 같은 나이의 오래된 아파트다. 이사 오기 전의 이 집은 잠시 빈 집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집을 보러 왔을 때 왠지 이 집이 잠시 죽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집에 새 침대를 넣고, 책상을 넣고, 예쁜 조명을 세우고, 책꽂이를 세워 한 권 한 권 책을 정리해 넣었다. 처음 이사 올 때보다 이 집은 여섯 살을 더 먹었지만 이제는 이 집이 건강하게 잘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속 독백은, 사랑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탄생했다. 도서관이 계속 멋지게 나이를 먹어가고, 오래오래 살아가는 풍경에 대해 상상했다. 책이 거기서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들숨 날숨처럼 글자와 사유들이 계속 밖으로 안으로 드나드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숨을 쉬는 게 실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발걸음이 기대와 설렘으로 오가는 도서관 로비를 애틋하게 떠올렸다.
김나리_작가
작가. 일주일에 나흘은 해방촌의 서점과 식당에서 일하고, 사흘은 글을 쓴다. 첫 번째 에세이 《나리 나리 김나리》를 펴냈고, 문예 단행본 《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시리즈에 참여했다.
[스토리]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현대국립도서관을 짓는 경합에 참여하는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신입 건축가 사카니시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종합건설사무소에 취직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카니시는 무라이 사무소에 일하
[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근처에 있는 도서관의 존재를 모르고 일상을 살다가도 대학 입시 논술이나 취직, 이직을 준비할 때 등 인생의 변곡점에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보다 든든한 자료를 얻기 위해 도서관에 가
[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네가 알면 기뻐할 일이 있어. 도서관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단다. 으르렁거리면 안 됨. 단,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는 예외임. 그러니까 다친 친구를 도와야 할 경우 같은 것 말이지.” 《도서관에 간 사자》의 작가인 미셸 누드슨은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