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이 이럴 수도 있구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1860 거리의 엘 아테네오 그란드 스플렌디드(El Ateneo Grand Splendid)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1919년 문을 연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이 책방에서 책은 한 권 한 권이 주연배우가 된다. 귀족들이 도도한 표정으로 오페라를 관람하던 2층 좌우의 귀빈석도 책의 차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는 찬사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엘 아테네오는 책을 판매하기 위한 서점일 뿐, 오페라처럼 강렬하지만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은 채 책에 푹 파묻힐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이다.
이시카와현립도서관 원형홀 ⓒ정영효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도서관 건축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의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은 엘 아테네오에서 느낀 갈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풀어주는 곳이다. 작년 7월 문을 연 이곳은 도서관이란 ‘네모반듯한 공간에 책장이 줄지어 있는 곳’이라는 상식을 깨뜨렸다. 도서관 전체가 4층까지 뻥 뚫린 15미터 높이의 원형 홀이다. 한 바퀴 둘레만 160미터인 이 책의 콜로세움에 30만 권의 책이 전시돼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개관 5개월 만에 53만 명이 방문했다. 이시카와현의 예상보다 두 배 많다. 정작 이시카와현이 의도한 것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 아니었다. 가몬 요시타카 이시카와현 문화진흥과 전문원은 “건축을 의뢰하는 단계에서부터 기묘한 건축, 화제성 건축이 아니라 정말 가보고 싶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꼭 가보고 싶은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가구다. 도서관을 지을 때 가구의 디자인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이시카와현은 발상을 전환했다. 오랜 시간 몸을 맡기는 책상과 의자야말로 도서관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의 의자 ⓒ정영효
이시카와현은 건축 설계와 별도로 가구 디자인은 유명 디자이너이며 ‘가와카미디자인룸’ 대표인 가와카미 모토미에게 따로 맡겼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세오토 의자’를 비롯해 ‘임스체어’ 시리즈, 덴마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의 작품 등으로 도서관을 채웠다. 덕분에 열람석이 500석인 이시카와현립도서관에는 의자와 소파만 100종류를 헤아린다.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고 빌리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데 중점을 둔 ‘체재형 도서관’이다. ‘사일런트 룸’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책을 볼 수 있다. 도시락을 싸와서 먹고 마시면서 책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 도서관에선 조용히 해야 한다는 심리적 장벽을 깨는 시도다. 덕분에 이시카와현은 코로나19 이후 일본에서 빠르게 보급되고 있는 ‘워케이션(원하는 곳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하는 근무 형태)’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일본 지자체들은 워케이션 인프라를 까는 데 열심이다. 워케이션의 성지로 각광받으면 젊은 이주자를 유치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워케이션의 성지가 된 이시카와현립도서관 ⓒ정영효
경기 침체에도 건축 거장들은 도서관을 짓고
2021년 말 현재 일본에는 3,316개의 도서관이 있다. 1,468개인 대학 도서관은 뺀 수치다. 버블(거품)경제가 붕괴한 1995년 2,297개였던 도서관 수가 30년 장기 침체를 겪는 와중에도 1,000개 이상 늘었다. 인구가 줄면서 국력이 예전 같지 않은 일본이지만 ‘도서관 인프라’만큼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일본은 세계 최고의 건축 강국 가운데 하나다. 1987년 단게 겐조를 시작으로 여덟 명이 세계 최고의 건축가로 인정받았으며, 이들 건축 거장들이 일본 전역의 도서관 설계를 담당하고 있다. 일본에는 1,741개의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기초 지자체의 절반 이상은 초(町)와 무라(村) 같은 시골이다. 여기에 사는 인구는 1,078만 명에 불과하며, 인구가 만 명 안팎인 초나 무라가 926개다. 그중 공립도서관을 보유한 초와 무라가 538곳이나 된다. 일본의 어디를 가도 도서관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홋카이도 북부의 겐부치초는 인구가 3,300명에 불과한 시골이지만 주말이면 외지인들로 붐빈다. ‘그림책도서관(絵本の館)’이란 어린이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다. 홋카이도의 또 다른 시골 마을 히가시카와의 공립도서관 ‘센토퓨어2’의 경우, 인구 8,0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도쿄 도심 23구에 뒤지지 않는 도서관이 마을의 커뮤니티 센터와 관광객 유치 거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고 있다.
1990년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침체에 신음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소득은 30년째 제자리인데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하느라 세금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도서관을 늘리는 건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없었을까.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을 짓는 데는 6년간 150억 엔, 한국 돈으로 1,400억 원 이상이 들었다. 인구 112만 명인 이시카와현의 한 해 예산은 5,700억 엔이다. ‘도서관 지을 돈이면 배부르고 등 따실 수 있는 다른 사업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불만을 어떻게 잠재웠을까. 가몬 전문원은 “문화에 대한 이시카와현 사람들의 남다른 이해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에도시대(1603~1867) 이시카와현의 옛 지명인 가가번은 에도(지금의 도쿄) 다음으로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자랑한 지역이었다. 가가번을 다스린 마에다 가문은 쌓아올린 부로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다. 가가번의 수도인 가나자와에 지금까지도 일본 3대 정원 겐로쿠엔과 같은 문화재를 비롯해 금박, 목공예 등의 예술 작품이 가득한 이유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식견은 교육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이시카와현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매년 초·중학생 학력 테스트에서 일본 1위를 놓치지 않는다. 또 이시카와현과 가나자와시는 일본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은 ‘21세기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문화 자원의 힘을 일찌감치 경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기꺼이 1,400억 원을 지출할 수 있는 역사·문화적 토양이 뿌리내린 것이다.
홋카이도 히가시카와공립도서관 ‘센토퓨어2’ ⓒ정영효
잘 지은 도서관 하나로 얻을 수 있는 것 그렇다 해도 도서관이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해서는 지속가능할 리 없다. 최근 일본의 도서관은 경제 논리에서도 ‘도서관 지을 돈을 다른 정책에 써야 한다’는 비판론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도서관이 저출산·고령화로 급격히 침체하는 지방 경제를 되살리고 인구 감소를 늦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시카와현과 가나자와시 역시 심각한 인구 감소를 겪고 있다. 가몬 전문원은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은 마을의 축소를 막기 위한 최후의 도전”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경제 효과가 확인된 곳도 있다. 2018년 2월 시립중앙도서관을 확대 이전한 홋카이도 구시로시는 2019년 한 해 동안 2억 3,660만 엔의 경제 파급 효과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연간 이용자수가 21만 명으로 2.3배 늘면서 소비가 증가한 덕분이다. 규슈 다케오도서관도 ‘도서관의 경제 효과’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인구 5만 명의 관광도시 다케오는 2013년 지자체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대형 서점 쓰타야를 운영하는 ‘컬처컨비니언스클럽(C.C.C)’에 시립도서관의 운영을 위탁했다. 컬처컨비니언스클럽은 다케오도서관을 도서관 겸 서점으로 꾸며 재개장했다. 컬처컨비니언스클럽에 운영을 맡기기 전인 2011년 25만 명이었던 연간 방문객이 재개장 후 2013년 92만 명으로 3.6배 늘었다. 다케오 지역 숙박시설의 가동률은 두 배, 음식점 매출은 1.2배 증가했다. 관광지로 입소문이 나면서 2013년 2,700명이었던 외국인 관광객이 2017년 24,000명으로 13배 늘었다.
다케오시는 재개장 약 2년 뒤인 2015년 “지금까지 다케오도서관 위탁으로 인한 경제 효과가 20억 엔, 이와 별도로 광고 효과로만 16억 엔이 발생했다”며 “각종 미디어가 다케오도서관의 변신을 앞 다퉈 보도한 덕분”이라고 밝혔다.
다케오도서관은 쓰타야와 접목했다고 해서 ‘쓰타야도서관’으로 더 알려졌다. ‘공공시설을 민간회사가 운영하는 게 맞느냐, 개방 초기에만 반짝 효과를 낼 뿐 실제 경제 효과는 과장됐다’ 등의 논란도 있다. 하지만 일본 전역의 지자체들이 컬처컨비니언스클럽에 공립도서관 운영을 맡기고 있다. 현재는 가나가와현 에비나시, 와카야마현의 와카야마시 등 일본 전역에 아홉 개의 쓰타야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잘 지은 도서관 하나가 지역 소멸을 막는 사례도 있다. 시코쿠 고치현과 에히메현 사이의 산간 지역인 유스하라초는 1957년 11,217명이었던 인구가 2020년 3,307명까지 줄었다. 일본 국립 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는 유스하라의 인구가 2045년 2,000명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해발 1,455미터에 위치한 유스하라초는 91퍼센트가 삼림지역이다. 마을은 스스로를 ‘구름 위의 마을’이라고 소개한다. 불리한 입지 때문에 소멸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2018년 5월 인기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한 ‘구름 위의 도서관’이 문을 열면서 인구 감소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주말마다 외지인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된 덕분이다. 빈 집을 보수해 싼 가격에 임대하는 마을의 지원책과 맞물리면서 6년 사이 20대와 30대 200여 명이 이곳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기도 했다. 지방 쇠퇴와 인구 감소로 인한 소멸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으면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이주자는 오지 않는다. 일본 인구정책의 가장 큰 부분을 산업 활성화 같은 경제부흥 대책이 차지하는 이유다. 하지만 일본 구석구석에 이동통신사 기지국처럼 자리잡은 도서관들은 문화의 힘 또한 소멸을 막을 수 있는 대안임을 증명하고 있다.
정영효_기자
기자. 2020년 3월부터 현재까지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에는 2012년 6월에 입사해 기업 인수·합병(M&A) 담당 기자로 일했다. 삼성그룹이 방위산업 및 화학 계열사 네 곳을 한꺼번에 한화그룹에 매각한 ‘삼성·한화 빅딜’ 특종 등으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일본을 연구했다. 2011년부터 1년 동안 어릴 적 꿈이었던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2024년 10월 1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호명했다. 더 라이브러리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맞이해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 문학이 가진 힘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노벨문학상 특집 칼럼]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병국이 MZ가 읽을 만한 한국 소설 10권을 추천한다. 201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우승은 못 했지만 우승자 이상의 인기를 얻은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리사로서 맛이 가장 중요하지만 음식에 스토리를 입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기에 셰프나 아티스트는 음식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느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하지요.”“누구나 맛있는
물리적 공간에 디지털 감각이 융합한 피지털‘피지털(Phygital)’은 물리적 오프라인 공간을 의미하는 ‘피지컬(Physical)’과 ‘디지털(Digital)’의 합성어다. 오프라인의 단점과 온라인의 단점을 서로 간에 유기적으로 보완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만족도를 높이고, 상품 구매에 대해 좀 더 편하고 직관적인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