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큰아이가 디즈니플러스라는 OTT로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보기에 나도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예전에 재미있게 봤고 음악도 기억에 남는 만큼 지금 봐도 감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하지만 잠깐 보는 동안 진행이 어찌나 더디던지 지루하고 답답해서 계속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갖가지 ‘숏폼’ 콘텐츠와 스피디한 스토리 전개에 익숙해져버린 걸까? 그러니 이런 시대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오래된 음악을 들으라고 권해도 되는 것일까? 클래식 음악은 이제 우리에게 의미를 잃은 것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서가에서 책 하나를 빼 들었다.
그 책은 KBS 클래식FM 개국 33주년이던 2012년, 4월 2일 개국일에 맞춰 탄생한 책 《행복한 클라시쿠스》다. 라틴어인 ‘클라시쿠스classicus’는 ‘고대 로마 시민의 최상위 계급’을 일컫는 용어이며 ‘일류의, 잘 정돈된, 품위 있는, 영구적인, 모범적인’이라는 뜻을 가진다. 짐작할 수 있듯 ‘클래식’이란 단어의 어원이다. 허나 이 책에서는 이 단어를 ‘클래식과 함께하는 사람들’, ‘클래식과 대화하는 사람들’, ‘클래식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을 칭하는 말로 쓴다. 즉, 예술 전반에 있어 ‘클래식’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면서 즐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클라시쿠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일곱 명의 저자가 옴니버스 형태로 쓴 책이다. 저자는 2012년 당시 KBS 클래식FM 프로그램의 주요 진행자이거나 출연자들이다. 작곡가가 써놓은 악보를 연주로 구체화시켜 감상자에게 들려주는 사람이 연주가라면, 방송 진행자는 음악을 말로 구체화시켜 청취자에게 들려주는 사람이다. 물론 음악이라는 게 꼭 누구의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같은 음악이라도 듣는 이마다 다 다르게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고수들의 감상 포인트라든가 음악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음악에 더 흥미롭고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의 음악 감상에 조력자 역할을 하는 고수, 방송 진행자들이 방송에서 미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현재 ‘명연주 명음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정만섭을 비롯해 이미선, 유정아, 장일범, 정준호, 유정우, 김용배로 짜여진 클래식 음악 방송계의 거장(!)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클래식 음악에 빠지게 된 순간, 그 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덕후가 되었는지, 그러다 이제 음악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연들이 필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진다. 어떤 이는 가족사로, 어떤 이는 연애사로, 또 어떤 이는 연주자로서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내놓는다. 책을 펼치고 나면 금방 접을 수가 없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남의 사적인 이야기에는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재미에 그칠 달달한 얘기만 풀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제기한 나의 의문점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이 곳곳에 있다. 《행복한 클라시쿠스》의 저자들도 비슷한 의문을 갖거나 고민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면, 저자 중 한 사람인 유정우 박사가 고민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 하는 문제다. 그는 그 답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서동시집오케스트라(*서동시집西東詩集, West-östlicher Divan: 괴테가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에서 받은 영감으로 쓴 시집)의 활동에서 찾는다.
이 오케스트라는 1999년,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와 뜻을 합쳐 만들었다. 서로 대립하는 두 지역의 젊은이들은 언젠가는 오게 될 평화를 꿈꾸며, 연주를 통해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원수지간에 가능하지 않은 일을 음악을 통해 해보는 것이다. 이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바로 클래식 음악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통찰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창단 당시의 숭고한 뜻에 비해 여전히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 세계정세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지만, 뭐라도 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용기 있는 행동은 결코 무의미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경우뿐 아니라 이 책은 여러 대목에서 우리가 왜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 그 가치는 무엇이며 내 생활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지를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고 답을 찾게 한다. “나는 왜 클래식 음악을 듣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그것(클래식 음악, 더 나아가 예술 전반)이 아니면 결코 건드려질 수 없는 내 안의 그 무엇인가를 자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자각은 힘들고 슬플 때 위안을 주는 것으로, 어렵고 두려울 때 용기와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작용한다. 또한 가슴 벅찬 환희,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한 클라시쿠스》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인 동시에 고상하고 우아한 에세이, 지적인 향연이기도 한데, 일곱 명의 저자가 각자 글의 말미에 추천 음반을 소개하고 있어 책을 읽는 도중이거나 덮는 순간 음악을 찾아 듣게 만든다. 무엇보다 난 이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결국은 음악을 듣자고 쓴 글일 테니 말이다.
[음악 감상]
이 책의 저자, 일곱 명의 클래식 음악 방송 고수가 추천한 음반(CD, DVD)은 모두 23종으로, 대부분 저자가 펼친 이야기와 관련 있는 음악들이다. 그중에서 몇 곡을 골라 다시 들어본다.
비제 G. Bizet /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Les pêcheurs de perles> 중 2중창 ‘깊은 사원에서 Au Fond Du Temple Saint’
(이미선 아나운서의 추천 음반 중에서)
(테너 니콜라이 게다Nicolai Gedda & 바리톤 에르네스트 블랑Ernest Blanc)
오페라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또 하나의 유명한 오페라 <진주조개잡이>는 인도양의 실론 섬(현재 스리랑카)을 배경으로, 진주를 캐는 어부 나디르와 주르가가 제사장인 한 여성을 사랑하면서 일어나는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오페라에서는 나디르가 부르는 테너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이 제일 유명하지만, 두 친구가 우정을 다짐하며 부르는 2중창 ‘깊은 사원에서’ 또한 놓치면 안 되는 매우 아름다운 곡이다.
모차르트 W. A. Mozart /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Clarinet Quintet in A, K.581 중 1악장 알레그로Allegro
(정준호 칼럼니스트의 추천 음반 중에서)
(아카데미 체임버 앙상블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Chamber Ensemble)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작품 중에서 협주곡과 더불어 가장 사랑받는 곡이다. 따뜻한 클라리넷 음색이 우아한 멜로디에 얹혀 클래식 음악 초심자부터 애호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는다. 전 4악장 가운데 1악장을 듣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악장도 마저 더 듣고 싶어진다.
슈만 R. Schumann / 피아노4중주 E플랫 장조 Piano Quartet in E Flat, op.47
정만섭 진행자는 이 곡을 ‘슈만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에 작곡된 곡으로, 낭만적인 감수성과 선율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추천하면서 책 속에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고 있다. 특히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영상에서 12:42부터 시작)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된다.
베토벤 L. van Beethoven / 교향곡 9번 <합창> Symphony No.9 in D minor "Choral" op.125 중 4악장 피날레(프레스토-알레그로 아싸이) Finale (Presto - Allegro assai)
(의사이며 음악칼럼니스트인 유정우 박사의 추천 음악 단체)
(2012년 7월 28일 BBC 프롬 공연 실황,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지휘), 서동시집오케스트라 & 다수의 독창자와 합창단)
유정우 박사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서동시집오케스트라의 2005년 라말라 콘서트 실황 DVD를 추천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서동시집오케스트라가 인류 평화를 위해 뜻을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듣는 것이 더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해서 이 영상으로 감상해본다.
임주빈_전 KBS 클래식FM PD, 음악 칼럼니스트
임주빈은 KBS 클래식FM에서 다수의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KBS 라디오센터장과 예술의전당 이사를 역임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힘을 쏟았고, 지금은 강의,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많은 이와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작곡가의 생애와 대표작을 수록한 CD 시리즈 “Listen & Lesson – 해설이 있는 클래식‘ 20종을 기획, 제작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귀는 출처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마치 늘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익숙하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그는 아마도 십대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거쳤을 것이다. 그 통과의례는 다름
우리나라의 겨울 중 가장 추운 달은 언제일까? 기상청 통계를 보니 예상대로 1월의 평균기온이 가장 낮다. 지금이 겨울의 한가운데, 가장 추울 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 매서운 칼바람이 1월의 모습이다. 이즈음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빠지지 않고 선곡되는 음악이 있다면, 바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의 건강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데, 한 외국 여성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암을 최초로 발견하고 경고한 것은 바로 반려견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려견이 주인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고 계속 경고성 행동을 해서 병원에 가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암세포에서 발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