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으며 독서문화 프로그램에도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인천 연수구에 위치한 푸른마을 함박도서관에 고려인 한국어 교실이 생긴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푸른마을 함박도서관 권정현 사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푸른마을 함박도서관은 개관을 한 지 12년 된 작은 도서관이다. 인천 연수구는 전출입이 빈번한 원룸 지역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작지만 다양한 문화 체험과 독서활동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도서관을 열었다. 다채롭고 적극적인 프로그램으로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며 성장하던 도서관에 몇 년 전부터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을의 구성원이 점차 바뀌어가고 있었다. 원룸에 거주하는 내국인이 많던 동네가 고려인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쪽 이주민들이 터를 잡는 곳으로 변해갔다. 거리의 간판들이 러시아어로 바뀌고 주변 학교에도 이주민 아이들이 절반을 넘어섰다.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도서관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잇몸으로’ 이루어낸 한국어 교실의 탄생
마을 주민의 구성이 변하면 도서관도 다른 방법으로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한 고려인으로부터 저녁 한국어 수업을 요청받았다. 낮 시간 한국어 수업을 하는 기관은 더러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낮에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이주민들은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은 여러 나라의 이주민이 혼재하며 살고 있지만, 정착 초기만 하더라도 고려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조부모의 나라에서 꿈을 실현하고자 왔지만, 중국의 조선족 동포와는 다르게 대를 이어오면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한국어를 완전히 지운 채 살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조상들의 땅에 왔어도 생활에 가장 필요한 언어가 큰 걸림돌이 되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다. 우리 마을이 고려인 이주민으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어 습득인 상황에서 답은 하나였다. 우리에겐 그들이 가장 절실해하는 것들을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녁 한국어 교실이 탄생했다. 한국어 교실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을 진행할 교사를 찾는 것이었다. 저녁 수업이라 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전하던 중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정신으로 도서관 운영위원 몇 분이 지원해주어 한국어 교사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후, 저녁 한국어 교실 홍보를 위해 홍보 전단지를 동네 곳곳에 붙였고, 전단을 보고 찾아오신 분들과 함께 첫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참석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주변 일대에 한국어 교실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인원이 계속 늘었다.
현장에서 일을 할 때 가장 답답함을 느꼈을 분들이기에 실용적인 대화 위주의 학습으로 진행했다. 다만, 한국어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한글을 아예 모르는 분들부터 듣기는 어느 정도 되지만 말하기가 어려운 분들까지 단계를 나누어 4~5반 정도를 운영했다. 낮에 고단하게 일하고 밤에 한국어 공부를 하러 오는 분들을 보며 친근한 마음과 함께 존경심이 들기도 했다. 대부분 성인 위주의 수업이었지만 중도 입국 청소년들이 종종 찾아와 수업을 듣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한 수업 종료,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
자리를 잡아가던 저녁 한국어 교실은 코로나19로 대전환을 맞았다. 코로나로 다인 시설의 출입이 제한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오미크론이 인천 연수구에서 처음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어 교실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됐다. 그렇게 푸른마을 함박도서관의 저녁 한국어 교실은 2020년 수업을 종료하게 됐다. 코로나가 종식된 지금까지도 저녁 한국어 교실이 재개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간 지역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이 많이 생기고 각 기관에서도 다양하게 지원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저녁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며 타 기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있다.
저녁 수업은 종료됐지만, 지금은 자원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아동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막 입국해 한글 학습이 필요한 아동부터 듣기와 말하기가 가능하나 학교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동들까지 수준별로 4개 반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아이들이 한국어로 인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다.
작지만 큰 도서관, 한국어 교실로 한국과 더 가까워지길
도서관이 있는 지역의 경우 현재 초등학교의 이주민 아동 분포가 60%를 넘어선 상황이다. 학교에서도 협력 교사의 도움 없이는 수업을 원활히 진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내국인 아이들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이주민 아이들은 한국어와 한국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어 수업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도 이런 상황을 걱정스럽게 생각하여 아동 대상의 한국어 수업에 좀 더 세심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지난 학기 한국어 수업을 들었던 학생 율리아나는 부끄러움이 많고 한국어 발음에도 자신이 없어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국어 수업을 통해 한국어에 자신감을 얻고 점차 적극적인 아이로 변화해갔다. 도서관 식구들 모두 율리아나와 하루 한 번 대화하기를 일과에 넣을 정도였다. 이처럼 아이들이 도서관의 한국어 교실을 통해 한국어, 그리고 한국과 더 가까워지길 기대해본다.
한국어 수업을 두 학기 들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그림책을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는 '자신만의 책 만들기'를 진행할 계획이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이 큰 일을 해낼 수는 없겠지만, 마을 환경과 이용자가 바뀌어가는 흐름에 맞춰 프로그램의 내용과 형식을 조금씩 변형하며 이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이 먼 세대를 거쳐 조상의 땅에 정착하려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오늘도 부지런히 교재를 찾고 교안을 만들어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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